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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nnel: 22nd's Safehouse

Chapter 002: 서베를린은 왜인지 흐림 -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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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하 1층에 도착한 엘리베이터에서 나와 패찰과 신분증을 교환하고, 모자를 잠깐 벗고 기름기로 범벅이 된 뒷통수를 벅벅 긁으며 하품을 한 뒤, 평소처럼 가정집 현관문처럼 보이는 문 밖으로 몸을 꺼내려던 그는 단독 군장 차림의 병사들이 무거운 포탄 박스를 낑낑대며 가지고 들어오는 바람에 잠시 자리를 비켜 주어야 했다.

  무슨 일인가 살짝 궁금해 하며 바깥으로 나와보니, 진짜 출입구로 기능하는 위장 가옥 몇 채와 출입구 위장 가옥인 척 하는 가짜 출입구 위장 가옥들로 구성된 그런 ‘가짜 마을’ 주변이 온통 여기저기 쏘다니는 군용 트럭들의 엔진소리와 하늘을 가르는 Mi-17 헬리콥터의 엔진소리로 시끌시끌했다.

  주변 집들의 지붕을 보고 자신이 걸어 나왔던 위장 가옥의 지붕을 살펴보니, 여기도 기존의 지붕이 듣어진 채 57밀리 견인식 대공기관포가 위장망에 가려진 채 제대로 방열 되어 있었다.   집 앞에는 트럭이 한 두대씩 정차 한 채 짐칸에서 나온 몇 명이 57밀리 대공포용 탄 박스를 꺼내어 앞마당에 널부러트리고 있었다.

   저걸 어떻게 지붕 위에 올려놓았나 살짝 궁금했던 그는, 출입구 기능을 하는 건물들과는 달리 무슨 폐가 처럼 보이는 몰골의 가짜 입구 위장 가옥의 지붕이 있던 자리에 Mi-17 헬리콥터에 슬링으로 연결된 57밀리 S-60 대공기관포가 사뿐히 내려앉는 모습을 보며 소소한 의문의 해답을 얻었다.

  트럭에서 휴대용 대공미사일 세트가 들어있는 박스를 든 방공포병 두엇이 그가 나왔던 ‘관사’ 안으로 바삐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 11 -

  그는 볼로쟈와 구면이었다. 볼로쟈가 그를 부를때 친구라던지 직장상사, 후배같은 표현을 안 쓰는 점에서 알 수 있듯이, 서로 일하는 직장이 다른 터라 자주 만날 사람도 아니었고,  그를 찍어 누를 만큼 계급이 높거나 반대로 그가 함부로 굴릴만큼 계급이 낮지도 않았다. 평소 알고 지내는 친구라면 지금 여기서 만날 수도 없었을테고 말이다.

  “누워서 떡먹기네요.”

  그것이 템펠호프 공항을 둘러본 그 미묘하게 안면을 튼 사이의 사내가 보여준 감상평이었다.

  “비행기도 별로 없고,” 사내는 계속 말을 이었다. “경비도 썩 튼튼하진 않고.”

  “아무래도 지금은 1948년이 아니니까요.”

  볼로쟈는 그렇게 건성으로 대꾸했다. 지금 이 사내가 공항을 둘러보는 이유를 알게 된 이상, 아무렇지 않게 평상심을 유지하고 가이드 노릇을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뭐라고 설명할 길도 없었다. 답답했다.

  “그렇죠. 48년. 그때 길을 다 틀어 막았는데 여기로 비행기가 들락거려서 허사가 됐지.”

  사내는 일본제 캠코더를 들고 공항 여기저기를 찍으면서 말을 받아 줬다.

  “그때 여기를 아작 낼 수 있었다면… 지금 우리가 이러고 있을 필요도 없었을텐데 말이죠.”

  사내는 템펠호프 공항에서 평소에는 잘 보이지 않던 무언가를 찍고 있었다. 평시와는 달라진 주요 포인트라 놓치지 않을 수 없었다.

  “어쩔 수 없었죠. 그때 우리는 아직 원자폭탄이 없었으니까.”

  볼로쟈는 다시, 아까처럼 적당히 말을 받아 주며 슬쩍 펼쳐 놓은 캠코더 화면을 살펴보았다. 확실히 관심을 가질만한 물건이었다. 20밀리 발칸포 몇 문이 활주로 바깥의 잔디밭에 듬성듬성 늘어서 있었고, 중간 중간에는 하늘을 향해있지만 지금은 꺼져 있는 서치라이트가 배치되어 있었으며, 드문 드문 미제놈들의 신형 경 트럭이 기관총을 걸어 놓고 여기저기를 쏘다니고 있었다.

  “저게 좀 신경 쓰이긴 한데, 조금 주의하면 큰 문제는 없겠네요. 생각보다 허술하네.”

  이 방면의 프로가 보기에는 꽤나 허술해 보이는 듯 싶었다. 볼로쟈는 공작원일지언정 특수전 요원은 아닌 터라 이 방면에선 솔직히 문외한이었지만,  방금 전 그의 옆을 지나치던 몇 명의 미군 병사들이 아무런 신경도 쓰지 않고 이 수상한 관광객들을 지나친 것만 봐도 알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볼로쟈는 티를 내진 않았지만, 속으로는 괜히 짜증이 나려고 했다. 지금 그의 옆에서 싱글거리고 있는 군정보국의 특수부대 소령 녀석은 콧노래를 부르며 여기저기를 눈여겨보고 수첩에 메모를 하고 있었지만, 볼로쟈가 보기엔 불장난도 이런 불장난이 없었다.

  볼로쟈가 콜랴에게 연락을 받아 이 남자를 픽업한 것은 평소 접선지점으로 종종 써먹던 블리처 가르텐이었다. 그 남자의 일 역시 블리처 가르텐에서 시작되었고 말이다.

  “정찰 임무입니다.” 사내가 말을 이었다. “나토 놈들의 병력 재배치가 이뤄지고 있으니, 작계 지점에 어떤 변화가 생겼는지 알아보러 가는 거죠.”

  “그럴 만도 하죠. 시국이 시국이니.” 볼로쟈는 속으로는 ‘동무들이 여기서 뺑이 칠 일은 없을 걸.’하고 이죽대면서도 티를 내지 않고 “위에서 언제 여기를 해방하려고 할 지 장담 못 할 분위기니까요.” 라고 말을 이었다.

  “그러게 말입니다.” GRU에서 나온 사내는 한숨을 푹 쉬고 말을 다시 이었다. “내가 여기서 산 것이 3년 째인데, 이런 일은 처음이에요. 동무도 모스크바랑은 연락이 일절 안 되고 있죠?”

  “두말하면 잔소리죠. 나도 답답해 죽겠어요.”

  “GSFG 놈들도 알아보고 있다는 이야기밖에 없고. 하긴, 군 사령부 파견 나간 동무네 분소에서도 안 되는 연락을 볼로쟈 동무가 할 수 있을 리가 없겠지. 답답해서 해 본 소리에요.” 라더니, 그는 섬뜩한 단어를 입에 올렸다.

  “이런 마당에 < 작계 V > 실행 명령이 떨어졌으니 원. 아니, 차라리 그게 당연한 거겠지만.”

  “잠깐만요. 무슨 작계요?” 

  볼로쟈의 예상을 깨는 단어였다. 뭐 지금이 서로가 오해를 할 만한 그런 시국이긴 했지만, 그래도 서로 먼저 쳐들어 갈 생각은 없었다. 그런데 지금 무언가가 모스크바의 KGB가 생각한 것 과는 다른 방향으로 굴러가기 시작했음을 알게 된 것이다.

  “우리 잠깐 앉읍시다.” 어쩌다 보니 이번에도 평소 앉던 그 벤치였다. “< 작계 V >요. 군사령부에서 브리핑해준 내용을 들어보니까, 상황이 심각한 거 같더라구요. 동무. 지금 모스크바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TV 봐서 알죠?”

  “뭐, 그걸 모르면 말이 되겠어요?”

  “근데, 그게 말이 안 되잖아요. 생각해봐요.우리가 워싱턴 DC에서 가스 폭발사고가 벌어졌다고 군 병력을 전방으로 배치하겠어요?”

  슬슬 무언가 잘못되어간다는 느낌을  받은 볼로쟈의 머리가 팽팽 돌아가기 시작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이 GRU 소령놈은 제 딴에는 조심한다는듯 목소리를 낮추고, 누구도 알아듣지 못하게 사용하던 언어를 불어로 바꾸더니 말을 계속 이었다. 

  “위에서는 보나마나 나토 파시스트놈들이 이쪽으로 쳐들어 올 거라고 파악한 모양이에요. 멍하니 앉아있는데 이미 놈들이 쳐들어 올 준비가 끝났으니, 설령 지금 당장 우리가 치고 들어가도 이미 기습당한 뒤나 다름 없다던가? 상비 병력 재배치, 동원 병력 소집 뭐 하나 저놈들보다 한 박자씩 늦어질 판이니 말이죠.”

  “그럼 모스크바에서 났다는 사고와 통신 차단은…….”

  “보나마나 언론 플레이겠지. 이 마당이라면 모스크바에서도 당장 우리가 움직여 주기를 바랄 거다, 이 말이죠. 그런데 우리끼리 전면전을 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그는 손이 심심한지 입이 심심한지 담배를 꺼내며 말을 이었다. 

  “우리끼리 방어 계획이라도 미리 수행을 해야, 추후 전쟁이 벌어졌을 때 그래도 저놈들이 바르샤바까지 한순간에 집어삼키는 사태를 방지할 수 있다, 이거죠.” 그리고 그는 담배에 불을 붙이며 씁쓸하게 말을 이었다. “이미 늦었을지도 모르겠지만.”
  
  머리카락이 쭈삣쭈삣 서고 있었다. 오한이 돋아서 담배를 물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 직무에 충실한 군 정보국 특작부대 장교를 붙잡고 그가 아는 선의 자초지종을 다 털어놓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내가 말을 하면, 콜랴는 뭐가 되는데? 일을 기껏 성공시켜 놓은 모스크바의 어르신들은 또 뭐고?’

  당장에라도 전화기를 붙잡고 하소연을 하고 싶었지만, 티를 낼 수는 없었다. 3차 대전의 화마가 불어닥쳐도 제 한몸을 건사하도록 훈련된 몸이었다. 의식하기 이전에 몸이 그의 생각이 바깥으로 드러나지 않도록 행동하고 있었다.

  정찰 임무를 마치고 헤어진 것은 시작 했을 때 보다 네 시간이 지난 오후 5시 10분이었다. 오는길에 잠깐 골목길에 차를 멈춘 볼로쟈는 곧바로 조수석 서랍을 열어젖히고 안에 설치된 수화기를 꺼내 수화기에 달린 다이얼을 몇 번 누르고 초조하게 상대를 기다렸다. 다행히도 금방 받았다.

  [ - 나일세, 볼로쟈. 무슨 일이지?]

  “콜랴. 큰 일 났어요. 지금 군발이 새끼들이 우리 통제 바깥이라구요.”

  [ - 우리도 얘기 들었어. 일단 기다리고 있어 봐.]

  “이봐요, 콜랴. 지금 현장이 아니라서 상황 파악이 잘 안 되시나 본데,” 오한이 돋는 볼로쟈는 한숨을 내쉬고 다시 말을 이었다. “지금 그런 한가한 소리 할 때가 아니에요. 얘들은 지금도 이미 늦었다고 생각하고 있단 말이에요. 한 발짝만 더 삐끗 했다가는 나토 놈들이 보기에는 완전히….”

  [ - 이봐, 볼로쟈.] 콜랴도 어지간히 답답한 것 같았지만, 역시 답답한 소리를 늘어놓긴 콜랴 역시 마찬가지였다.

  [ - 자네 심정 이해가 가. 3차 세계대전을 목전에 둔 상황에 영웅이 되고 싶겠지. 하지만 지금 그래버리면 모스크바의 자네 상관들은 뭐가 되는건데? 내가 이럴려고 자네에게 윗선 동향을 다 알려 준 줄 알아?]

   “아니, 콜랴, 그렇다고 지금 저 꼴을 보고만 있어요? 이대로면 전쟁이 일어날지 모른다구요. 진짜 전쟁! 모스크바, 키예프, 워싱턴, 파리, 런던, 바르샤바, 그리고 여기 베를린까지! 전부 다 날아간다구요!”

  [ - 진정해, 볼로쟈. 지금 위에서도 더 늦기 전에 GSFG에 이야기를 설명할 준비를 하고 있어! 지금 자네가 말하는 식으로 앞뒤 사정 안 가리고 설명하면 우리는 뭐가 되는데? 동무도 국장님이랑 나랑 같이 쇠고랑 차고 시베리아로 가고 싶어?]

  “… 그건 아니지만. 아니, 그래도 이건…….”

  [ - 내가 해 줄 수 있는 말은 이게 전부군. 일은 이미 자네 선에서 해결할 수 있는 범위 바깥이야. 내 선에서도 떠났고… 일단 루비앙카의 지시를 기다려. 전화 끊겠네.]

  그리고 전화가 끊겼다. 수화기를 내던지고 잠시 양 팔을 의탁해 둔 핸들에 고개를 파 묻었다. 집에 두고 온 가족들과 친구들 생각이 났다.  이승에서 마지막이 될 지 모를 통화를 직장 상사와의 통화로 마무리 짓고 싶지는 않았다.

  차를 빠르게 몰고 싶었지만 어느덧 안가에 거의 다다른 골목길이라 서행할 수 밖에 없었다. 중간 중간 그의 앞을 가로막고 세월아 네월아 천천히 서행하는 자전거 몇 대가 그렇게 얄미울 수 없었다. 그렇게 집 앞에 다다랐다.

  차를 멈추고, 내리기 전에 앞서 창문을 내리고 담배에 불을 붙였다. 가스를 거의 다 썼는지 불이 안 붙는게 짜증이 난 그는 자 구석을 더듬어 가스를 찾아 충전을 했다. 하려고 했다. 그 순간, 적당히 낡은 중고 벤츠 세단 한 대가 그의 비슷하게 낡은 중고차를 지나쳐 그의 집 대문 앞에 떡하니 주차를 해 버렸다.

  “Сука, 저 망할 경우 없는 것은 남의 집 앞에 어디다 대고…….”

  볼로쟈는 차에서 내려 한 마디 해 주려고 안전벨트를 풀고 잠겨있던 좌석 문의 잠금장치를 풀었다. 그러나 볼로쟈는 눈 앞에 정신이 팔려 백미러와 사이드미러를 살펴보지 않고 있었다. 그 결과는 그에게 기습적으로 다가왔다.

  이번엔 뒤에서 느껴지는 충격이었다. 과거 교통사고의 경험이 있던 볼로쟈는 본능적으로 뒤에서 차 한대가 박았음을 짐작했다. 시트에 털썩 주저앉힌채 뒷목과 허리를 잡고 신음하던 그의 몽롱한 눈에, 티셔츠를 안에 받쳐 입고, 철에 안 맞게 긴 상의를 하나씩 걸치고 있는 몇 명의 사내가 그의 차량 앞뒤에서 미꾸라지처럼 잽싸게 빠져나와 어느새 차를 에워싸고 있는 것이 보였다.

  깜짝 놀란 볼로쟈가 안주머니에 손을 넣으려고 할 때, 차가운 쇳소리가 그의 앉은 자리 왼쪽에서 들렸다. 고개를 돌려보니, 미제 45구경 자동권총의 총구가 그의 머리통을 겨누고 있었다.

  “재미 없게 굴지 말고, 조용히 갑시다. 예?”

  우크라이나 사투리 느낌이 배어있지만 유창한 러시아어였다. 그 사이에 다른 녀석 하나가 아까 눈 앞의 ‘불법 주차 민폐 이웃’에게 항의하려고 잠금을 풀었던 문을 열고서는 뒷목을 잡고 간단하게 그를 끌어 내렸다. 그의 차 뒤를 박았던 미니버스는 어느새 볼로쟈의 승용차 옆으로 나가와 옆문을 활짝 열고 있었다. 

  차에서 끌려나온 볼로쟈가 다시 정신을 차리고 저항을 해 보려는 찰나, 이번엔 뒷통수를 무언가 무거운게 확 내려치는 느낌이 들었다. 힘이 확 풀리면서 무릎을 아스팔트 포장도로에 찧고 풀썩 쓰러진 그가 비틀거리며 뒤를 돌아보니, 45구경 권총으로 아까 그를 협박했던 녀석이 그의 다리를, 다른 한 녀석이 그의 양손을 뒤로 젖히고 무언가 플라스틱 끈같은 걸로 결박을 시켰다. 

  포승줄을 푸는 법은 교육을 여러 번 받았었지만 이런 건 칼 없이는 무리인데, 이 녀석들은 어느새 그의 몸을 뒤져 소독된 발터 PPk 자동권총과 기타 개인 소지품을을 전부 걷고 있었다. 뒤이어 한 녀석이 박스 테이프로 볼로쟈의 입을 막았다.

  미니버스 뒷좌석에 던져진 볼로쟈는 멍 한 가운데서도 필사적으로 자신이 처한 환경을 살펴 보았다. 조수석에 앉아있던, 아프간에 파병갔던  VDV놈들이 끼고 다녔을 법 하게 생긴 알이 꽤나 커다란 선글라스를 끼고 방탄복을 입은 여자 하나가 영어로 무전기에 대고 무어라 중얼거리는게 얼핏 들렸다. 평소같으면 알아 들을 수 있었겠지만, 뒷통수가 아직도 지끈거리고 어지러웠다. 그는 그대로 정신을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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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로쟈의 머리에 1911을 겨누고 그위 뒷통수를 후려치고서 결박까지 한 코왈스키는 나중에 굵은 선글라스를 낀 여자와 함께 뉴욕 시립도서관에서 볼로쟈와 재회하게 됩니다.



퓨리 (Fury. 2014.) (스포일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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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에 앞서서 : 못 보신 분들께 추천합니다. 꼭 보세요. 극장에서 볼 수 있는 기회를 놓치지 마세요. 






  극장에서 전쟁영화 보는게 소원이었어요. 헐리웃에선 전쟁영화 때려 친 지 오래잖아요. 이전처럼 전쟁영화가 홍수때 둑에 구멍난 듯 철철철 흘러 넘치는 시절은 앞으로 당분간은 안 올거에요. 그래서 더 보고 싶었죠. 

  그리고 소원 풀었습니다. 만족스럽습니다. 그냥 전쟁영화를 극장에서 봐서 만족스러운게 아닙니다. 그 흔치 않은 기회를 '잘 만든 전쟁 영화'를 가지고 즐길 수 있었다는 점에 만족하는겁니다. 

  일전에 네이버 블로그에서 전쟁영화에 대해 썰을 풀어 본 적이 있었습니다.(http://blog.naver.com/sfod_d/220073267796) '전쟁'의 '본질'에 집중하거나, '전장'의 '묘사'에 집중하거나. 이 둘중 하나를 잘 하면 그 전쟁영화는 흥행하거나, 당장은 흥행 못해도 걸작의 반열에 들 수 있습니다. 


  '퓨리'는 전장의 묘사에 집중한 영화는 아닙니다. 디테일하고 리얼한 묘사가 극 내내 보여지긴 하지만, 'Based on true story'를 자막으로 깔고 나오는 전쟁 영화와 드라마가 흘러넘치는 요즘 세태를 보면 확실히 그렇습니다. 영화 '퓨리'가 실화는 아니잖아요. 아무리 리얼한 영화를 만들려고 해도 진짜를 토대로 만든 영화보다는 딸릴 수 밖에 없죠. 

  대신, 퓨리는 전쟁의 '본질'에 집중합니다. 

  극의 배경은 45년 4월 독일입니다. 솔직히 2차대전사에 관심있는 사람들이라면 서부전선의 45년 4월에 대해 다른 시절에 비해 큰 비중을 두지 않을 것입니다. 

  이미 패색은 짙어지고, 나치 독일군은 이제 소수의 독기만 남은 (독기밖에 안 남은) 엘리트와 꼬맹이, 할아버지 할머니들에게 억지로 판저파우스트를 쥐어준 패잔병들입니다. 그 얼마 안남은거 다 베를린에 모아서 이제 다른 곳에선 의미있는 저항을 볼 수 없습니다. 저항다운 저항이라도 하던 녀석들도 4월 중순에 결국 손을 들었고, 모델 원수는 자살했습니다. 

  적어도 서부전선에서는 승패의 전환점이나 결정적 국면이 된 전투도 없었고, 역사에 길이 남을 전투도 없었습니다. 죽은 놈이 억세게 재수 없는 시절이었다, 이겁니다. 

  퓨리의 소식을 처음 접했을때 그래서 의아했습니다. 무언가 이야기하고 보여줄 만한 시간적 배경 공간적 배경이 아니니까요. 그래서 전투에 큰 기대 안했습니다. 라지만 아주 약간, 무슨 배짱을 가지고 그런 게임 다 끝난 시절을 배경으로 잡았는지 궁금했습니다. 

  그리고 보면서 알았습니다. 이 영화는 45년 4월 서부전선의 독일에서만 보여줄 수 있는것을 보여주는 영화라는 사실을요. 

  예. 이제 독일군은 패잔병 무리입니다. 억지로 노인네들과 코흘리개들에게 총을 쥐어주고, 못 하겠다는 보다 용기있고 솔직한, 혹은 그저 재수가 없었던 사람들은 백주대낮에 교수형에 처해져 가로등에 걸리는 시절입니다. 

  이제 독일군은 전투를 할 능력은 있어도 전쟁을 할 능력은 없습니다. 대규모 공방전도 없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들은 발악하듯 마지막 단말마의 비명를 내지르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런 다 끝나가는 시점에서도 전투는 계속됩니다. 얼마 안 남은 베테랑들은 노련하게, 저돌적으로 발악합니다. 그래서 다 끝난 판이라도 누군가는 여전히 죽어가고 있습니다. 그 사람들을 잊지 않은 영화가 바로 퓨리입니다. 마치 (영화 자체는 '리얼'을 제대로 묘사하는게 아쉬웠던) '고지전'에서 전쟁 초중반부의 격렬한 공방전 이후의, 모두에게 잊혀진 지리한 고지쟁탈전을 치렀던 사람들에 시선을 돌렸던 것 처럼 말이죠. 

  퓨리만의 또다른 매력은, '전차'라는 소품과 그것을 매개체로 엮인 한 팀, 크루의 느낌을 아주 잘 보여준다는 점입니다. 

  전차를 주인공으로 한 전쟁영화는 흔치 않습니다. 그렇기에 그들이 전투를 수행하는 방식의 묘사는 흔한 알보병이나, 스페셜리스트들인 특수부대원들이 주인공이 되어 보여주는 다른 전쟁영화들과는 다른 느낌이 있습니다. 

  혼자서 전쟁을 치를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영화 퓨리에서 그것은 더욱 강조됩니다. 백전노장 '워 대디'가 아무리 노련하고 카리스마적인 인물이라도 서리만 질러서는 나치새끼들에게 티끌만큼의 상처도 줄 수 없습니다. 

  '워 대디'가 명령했을때, 누군가는 명령에 맞춰 전차의 방향을 조절하고, 포탄을 장전하고, 주포를 사격해야 그의 명령은 비로소 전투력이 됩니다. 그의 아래에 묶인 전차의 승무원들, 그리고 그들의 집이자 관인 운명 공동체, '퓨리'가 기계적으로, 유기적으로 맞물릴 때에 그들의 전투력은 100% 발휘됩니다. 영화 '퓨리'는 그런 묘사를 긴박하고 치밀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만큼 크루의 구성요소중 하나라도 비거나 상태가 이상하면 전투력은 급감합니다. 궤도가 풀리고 무전기가 맛이 간 퓨리는 기병대의 후예에서 토치카만도 못한 신세로 전락합니다. 필사적으로 맞서는 퓨리의 크루들이지만 퓨리가 말을 안 들으니 피해는 점점 늘어가고, 그 피해는 또다른 인명손실을 수반합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들은 멈추지 않습니다. 

  지뢰를 밟아 궤도가 맛이 간 전차를 향해, 잘 훈련된 1개 대대병력이 접근한다는 소식을 들었을때, 다른 승무원들은 퇴각할 준비를 합니다. 합리적인 판단입니다. 

  그들에게 맞겨진 임무는 사단의 약점으로 쇄도하는 규모 미상의 적 병력을 저지하는 것이었습니다. 1개 소대에게 맞겨진 임무였지만 중간에 마주친 사나운 불청객의 훼방으로 전차는 고작 한대만 남았고, 그나마도 제 기능을 발휘할 수 없습니다. 

  '워 대디' 역시 잘 알고 있었을겁니다. 그는 미군이 유럽전선에 처음 발을 디뎠던 43년의 북아프리카 전선에서부터 굴러먹은, 미국과 나치와의 전쟁을 첫 순간부터 함께한 베테랑이니까요. 하지만 그는 퇴각 대신 포탑 위의 50구경 대공기관총의 장전손잡이를 당깁니다. 

  그 이유를 워 대디는 한번도 말 하지 않습니다. 뭐엇 때문일까요? 아마 워 대디는, 자신들이 임무를 포기하게 되면 1만명 이상의 병력이 유기적으로, 기계적으로 맞물리는 사단이 위기에 처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차마 자리를 비울 수 없던게 아닐까요? 

  워 대디의 잔류를 보며 차마 발길을 돌리지 못하고, 결국 다들 꾸리던 짐을 내려놓고 그들의 상처입은 동지 '퓨리'에 남은 다른 승무원들 처럼 말입니다. 

  지나친 확대해석일 수 도 있다는 점 잘 압니다. 그저 끝장으로 보고 싶다는 호기였을수도, 적전도피의 불명예와 죗값이 두려웠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제 생각에 가장 그럴듯한 이유는 그런게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해 주는, 요즘같은 세상에 흔치 않은 묵직한 전쟁영화, 퓨리입니다. 

  우리 국군 기갑병과의 대표 군가인 '충성전투가'의 원곡이자, 극중 찢어 죽여도 시원찮은 녀석들로 나오는 나치 새끼들의 기갑부대 군가인 'Panzerlied'의 마지막 절 가사가 참 잘 어울리는 그런 영화입니다. 처음으로 극장에서 본 전쟁영화를 멋지게 만들어준 감독과 배우들, 제작자들에게 깊은 감사의 인사 남깁니다. 


"Und laßt uns im Stich

einst das treulose Gluck,

Und kehren wir nicht

mehr zur Heimat zuruck,

Trifft uns die Todeskugel,

ruft uns das Schicksal ab, ja Schicksal ab,

Dann wird uns der Panzer

ein ehernes Grab."



"그리고 우리가 
훗날 운이 다해 버려지고, 
우리가 더 이상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고, 
죽음의 탄환이 우리를 맞춰 
우리의 운명이 다하면, 그래 운명이 다하면, 
우리의 전차는 
강철의 무덤이 되리라." 

- 'Panzerlied' 마지막 절 가사. 


P.S : 극 중반에 민가에서 눈살 찌푸리게 하던 탄약수 녀석,

 

그 녀석이 심술을 부리는 이유가 단순히 신참이 호강하는게 짜증나서였을까요?

 

그 역시, 북아프리카, 프랑스, 벨기에의 어딘가에서 '머신'과 '엠마'의 만남같은 만남을 해 보았기에

 

그것이 부질없음을 누구보다 잘 알기에, 서툴게나마 표현하려던게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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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002: 서베를린은 왜인지 흐림 -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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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 -
 
  너무나도 복잡한 마음을 안고 잠들어 버렸을 '추운 나라에서 온 스파이'를 짐칸에 쳐 박아 둔 채로, 우리는 CIA에서 빌려온 승합차에 몸을 싣고서 다시 제 갈길을 향했다.
 
  이미 기절시켜 놓았지만 혹시 중간에 깨어나더라도 여기가 어딘지 유추할 수 없게끔 하기 위해 친절하게 눈구멍 안 뚫린 두건을 표적의 얼굴 위에 씌워놓은 뒤, 나는 표적 건너 옆자리에 몸을 부리고 있는 조셉에게 손을 척 내밀었다.
 
  “뭐냐?” 짙게 썬팅된 창밖을 내다보던 조셉이 고개도 안 돌리고 물어봤다.
 
  “그 손수건좀 주라.”
 
  “이거? 아니면 내꺼?” 그제야 고개를 내 쪽으로 돌린 조셉이 물었다. 난 주저 없이 ‘이거’를 달라고 했다. 방금 빨갱이를 잠재운 그거 말이다.
 
  “피곤해 죽겠어. 나도 좀 잘래.”
 
  “음, 니가 잠들면 그 다음에 내가 뭘 할거같아?”
 
  “얼굴에 치약이라도 바를거냐?”
 
  “아니, 너랑 저 빨갱이놈의 옷을 갈아입히고 케이블타이를 손목에 채울 거야.”
 
  “미친 새끼.”
 
  말은 이렇게 하지만 잠 잘 수 없다는 것은 누구보다 내가 더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조그만 짬이라도 나면 바로 고개를 어딘가에 쳐 박고 새우잠이라도 자고 싶다는 마음은 진심이었다. 날밤 꼴딱 새고 이게 뭐하는 짓거리인지.
 
  탁한 차 내 공기가 졸음을 한층 강화시켜 주고 있었다. 창문을 썬팅해 놓은 데서 알 수 있듯 함부로 창문을 열고 다닐 수 도 없는 노릇이라, 나는 잘 보이지도 않는 앞 유리쪽으로 고개를 내밀며 앞에 뭐가 있는지 보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그런 내가 무심결에 고개를 다시 옆 창문으로 향하자, 눈에 새로운 것이 들어왔다. 입이 열렸다.
 
  “어라? 벌써 시내에 쫙 깔렸네.”
 
  골목길과 주택가를 나와 시내로 나오자, 여기저기서 심심찮게 험비와 2.5톤 트럭, 그리고 병사들을 볼 수 있었다. 운전석의 전자시계를 들여다보니 시간은 벌써 18시 40분을 조금 넘었다.
 
  “너무 갑작스러운 거 같아.”
 
  승합차 후방에서 후방경계를 하고 있던 부팀장 앨런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러자 용케도 목소리를 들었는지, 내가 무어라 대답하기도 전에
 
  “데프콘?”이라고 반대쪽 끝, 운전석에서 에드가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래, 데프콘 말이야. 아까 데프콘 3 떨어진 게 11시였잖아, 그리고 5시간 만에 데프콘 2가 떨어졌어.”
 
  “2로 올릴 상황이었잖냐. 그놈의 빨갱이 참모회의 끝나기도 전부터 동독군의 움직임까지 이상해지고. 갑자기 체코에서도 소련 놈들이 움직이기 시작하고, 우리도 가만 있을 순 없지.”
 
  “아니 내 말은 그게 틀렸다는 게 아니라,” 앨런은 시선을 차량 후방에 고정시켜 둔 채로 계속 말을 이었다. “참 아귀가 잘 맞아 돌아간다 싶어서 말이지.”
 
  “그건 그래. 여기서 뭐하면 실시간으로 반대쪽에서 받아 치고, 점 점 점 3차대전이 목전으로 다가오는 느낌이야.” 운전대를 잡고 있던 에드가 계속 말했다. “그러고보니 벌써 데프콘 2야. 쿠바 미사일 위기때도 데프콘 2까지 간 건 공군 애들 뿐이었잖아.”
 
  “어제 밤에만 해도 아무 일도 없었는데.” 앨런이 쯧쯧 혀를 차며 말했다.
 
  “늘어지게 늦잠 자고 일어나서 대충 아침 먹고,” 조셉이 MP5K 위에 올려놓은 손가락을 키보드라도 두들기듯 움직이면서 입을 열었다. 어제 그맘때 내가 뭐 하고 있었더라? 집에 전화하고 있었나.
 
  “느긋하게 회의 가서 먹물들이랑 미팅하고,” 이번엔 제인이 피식 웃으며 대화에 끼어들었다. 음, 다음에는 왠지 내 차례 같다.
 
  “이러다 진짜, 내일 이맘때 되기 전에 리포저 유닛들 여기로 불러오는 거 아니에요? 62년에도 이렇게 스피드하게 에스컬레이션이 진행되진 않았던 거 같은데.”
 
  “그 말을 부정할 수 없다는 게 너무나도 슬프구나.” 제인이 마운틴 듀 캔을 따는 소리가 들렸다. “내기 할까? 내일이 되기 전에 전쟁이 난다, 안 난다에 100달러씩.”
 
  “준위님은요?” 나한테 물어봤는데 내가 반응이 없으면 그건 매너가 아니다. 나는 어느족에 걸어야 하나 마음 속으로 약간의 저울질을 하면서 제인의 반응을 떠 보았다.
 
  “난 전쟁 안 난다에 100달러.” 그리고서 제인이 차 후방으로 고개를 돌렸다. “늬들은 안 끼어들래?”
 
  “그런 걸로 내기를 하고 싶진 않았는데… 저도 안 난다에 걸게요.” 조셉이 자신의 희망인지 승부수인지 모를 그런걸 걸자, 분위기가 다들 묘하게 전쟁이 안 난다로 몰리는 것 같았다. 나는 왠지, 여기서 누구 한명은 전쟁이 난다에 돈을 걸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 전쟁이 나더라도 돈 벌고 싶은거야?”
 
  “별 이유는 없고, 그래야 내기가 성립이 되잖아요. 다 한쪽에 돈 걸면 돈은 누구한테 받을 거에요.”
 
  “그래 뭐, 돈 버리고 싶으면 거기다 걸던지.” 제인은 그렇게 말하고선, 무거워진 실내 공기를 환기라도 시키듯 낙관적인 미래의 청사진을 발표했다.
 
  “전쟁 안나. 우리가 넘어갈 생각 없고, 쟤들도 넘어올 생각 없다는데 전쟁이 왜 나겠냐? 나면 서로 속 쓰릴걸.”
 
  “그래. 니 말이 맞다. 우리가 밀가루 안 팔면 단체로 굶어 죽을 놈들이 미쳤다고 전쟁 걸겠냐.”
 
  그런 대화가 오가는 사이 사거리에서 검문소를 하나 만났다. 제인의 말로는 방금 위에 이야기가 되었으니 바로 통과가 될거라고 했지만, 아직 이들에게 관련 사항이 전파되지는 못했는지 잠깐 차를 세우고 기다려야 했다.
 
  나는 창 밖의 풍경을 하나 하나 머리 속에 심어두었다. 어차피 이 안에 결박당한 남자 하나가 있다는건 검문소의 땅개들도 확인해 둔 터라 창문을 내려도 상관 없었다. 탁탁한 차 내 공기가 상쾌해지는 것 만으로도 여기 멈춰 서 있을 가치가 있었다.
 
  “야, 쿠퍼, 저 놈 봐봐.”
 
  “뭐 재밌는 거라도 있어?”
 
  우리 대신 베를린에서 근무하게 될, 그리고 나와는 베를린 이전부터 여러번 안면을 익혀둔 사이였던 <노크> 페더슨(Pederson)중사가 검문소 한켠을 턱으로 가리켰다. 키가 족히 6.5피트는 될 것 같은 거구의 흑인 SAW사수가 똥 씹은 표정으로 툴툴대고 있었다.
 
  “저 새끼 말이야. 아까 잠깐 얘기 해 봤는데, 휴가를 14박 15일로 끊어놓고 빨갱이들이 저 지랄터서 하루만에 원대 복귀했대. 존나 불쌍하지 않냐?”
 
  “비행기 안 타서 다행이네. 기왕 이 지랄 날거면 비행기 표 값 날아가는 것 보단 낫지.”
 
  난 그렇게 말하며 창 밖으로 내밀었던 고개를 하늘로 올렸다. 너무나도 맑고 청명한 하늘이었다. 이 하늘 아래, 저렇게 휴가 복귀당한 세계 각국의 장병들이 도대체 몇 명이나 있을까 조금 궁금해졌다.

창작물들 관련 잡소리들 약간 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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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극 무공 훈장>


관련된 약간의 잡설들.



챕터 1의 윤군이 살던 곳. 다만 본편애선 저렇게 짜놓은 설정을 거의 활용할 일이 없단게 유머


그냥그런 잡소리.


205여단 인원들중 실제로 써먹을 인원은 부소대장 나으리밖에 없단게 함정


프롤로그부터 챕터1 결말까지의 스토리. 근데 프롤로그는 아직도 안 쓴게 함정드디어 썼다!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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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극 무공 훈장> 본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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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극 무공 훈장> 관련 단편.


특수전 영빠의 블로그 아니랄까봐 22연대측 주요 인물이자 작내 히로인으로 설정중인 제인 하코트 소령의 소개를 겸하는 단편.


X-21 작전팀의 DM겸 RS(후방경계) 담당인 <스타벅스> 조지아 상사 소개를 겸하는 단편.


X-21 작전팀의 RM(무전수)겸 APL(부팀장)인 <앵그리코> 최준식 준위 소개를 겸하는 단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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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은 날의 서베를린>



관련된 약간의 잡설들.



맑은 날의 서베를린의 서베를린 HRT 구성원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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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은 날의 서베를린 본편.












tag :

에 뭐 결국 2015년이 오고야 말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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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인사, 를 드려야 해서 일단 키보드를 잡았습니다. 그런데 음, 뭐라고 써야 할지 아직 머리 속에선 정리가 안돼서 뒤죽박죽입니다. 두서 없는 글이라는 표현은 이럴 때 쓰라는 표현일겁니다.


단도직입적으로, 새해가 된다고 갑자기 없던 좋은일이 생기고 만사가 원하는 대로 풀리진 않을겁니다.


평소 요따구로 생각하며 살던 놈인지라 새해에 별 감흥은 없었습니다만, 2015년은 조금 다릅니다.


대략 22시간 전쯔음의 저는 퇴근길에 자전거 페달을 밟으면서 왠지모를 우울함과 울컥하는 느낌이 섞인 복잡한 기분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왜냐면 찾아온 새해가 다름아닌 2015년 이니까요.


그 때, 서기 2015년. 


이제 첫 하루가 지나가고 있는 올해지만 이미 너무나도 익숙하게 느껴지는 한 해입니다. 왜냐면, 제가 제일 좋아하는 만화의 배경이 2015년이니까요. 초등학교 4학년때부터 항상 전 2015년을 살아 온 느낌입니다.


그래서, 유난히 2015년을 기다리면서도 영원히 찾아오지 않았으면 했는데, 결국 그 날이 오고야 말았습니다. 에반게리온과 소류 아스카 대신 마크로스와 린 민메이같은 처자를 숭상하던 사람들은 몇년 전에 이미 이런 기분을 겪어보았을까요. 


 

현실이 된 2015년이 참 묘한 느낌이거든요. 제가 기억하는 2015년은 절대 이렇지가 않았는데, 2015년을 살게 된 저는 여전히 한심했습니다. 올해가 지나면 저도 어른이 될 수 있을까요. 막연한 미래로만 생각하던 2015년이 이제 제 인생의 한 부분을 차지하게 되면서, 그동안 제가 쌓아 올린 제 인생의 커리어는 정말 보잘것 없는 것 이었다는 점을 자기성찰하는 등 조금 멜랑꼴리한 기분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종종 2015년이 지나면 그때는 제가 어른이 되기 싫어도 어른이 되어버리게 될거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육체적으로 성인이 되었던 2010년 이래 아직 어른이 되지 못한 정신줄이 가지고 싶었던 일종의 유예기간일런지도 모르겠습니다. 이제 그 짧은 유예기간도 딱 364일하고 두시간 남짓 남았습니다.


어른이 될런지, 영원한 사회부적응자, 돈키호테가 될런지. 


이젠 모르겠습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01012015


P.S : 91년생 에반게리온 오타쿠들에게 한마디 - 


이부키 마야씨도 91년생입니다. 우린 동갑이었어요. 마야짱이라고 불러도 위화감 없을겁니다. 시키나미가 아닌 소류는 여전히 범죄레베루지만서도.


Chapter 002: 서베를린은 왜인지 흐림 -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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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야, 쿠퍼, 저 놈 봐봐.”
 
  “뭐 재밌는 거라도 있어?”
 
  우리 대신 베를린에서 근무하게 될, 그리고 나와는 베를린 이전부터 여러번 안면을 익혀둔 사이였던 <노크> 페더슨(Pederson)중사가 검문소 한켠을 턱으로 가리켰다. 키가 족히 6.5피트는 될 것 같은 거구의 흑인 SAW사수가 똥 씹은 표정으로 툴툴대고 있었다.
 
  “저 새끼 말이야. 아까 잠깐 얘기 해 봤는데, 휴가를 14박 15일로 끊어놓고 빨갱이들이 저 지랄터서 하루만에 원대 복귀했대. 존나 불쌍하지 않냐?”
 
  “비행기 안 타서 다행이네. 기왕 이 지랄 날거면 비행기 표 값 날아가는 것 보단 낫지.”
 
  난 그렇게 말하며 창 밖으로 내밀었던 고개를 하늘로 올렸다. 너무나도 맑고 청명한 하늘이었다. 이 하늘 아래, 저렇게 휴가 복귀당한 세계 각국의 장병들이 도대체 몇 명이나 있을까 조금 궁금해졌다.


- 13 -

  

  “에헤이 -  난장판 납셨구만.”


  방금 차에서 내린 매튜가 A4용지 뭉치들이 만드는 뭉게뭉게 연기에 눈살을 찌푸리며 손을 휘휘 저었다. 정성스레 잔디를 깎은 앞마당은 삽으로 만신창이가 되어 있었고, 구덩이 한복판에는 석유라도 부은 듯 노란 불꽃이 기운차게 일렁이는 가운데 무심한 표정의 해병들이  서류뭉치 따위를 휙휙 집어 던지고 있었다. 집 안에 인테리어의 일부로 장만한 벽난로 같은건 성에 차지 않았나보다.


  CIA가 이 도시에 확보하고 있는 ‘안가’는 이번 작전 수행에 꼭 필요한 정보를 자백한 < 닥스훈트 > 가 심문 당하는 그 곳 외에도 몇 곳인가 더 있다. 하지만 인력 하나를 제대로 심문할만한 충분한 설비가 갖춰진 장소는 이미 입주자가 등록되어 있었다. 결국 방법은 하나 뿐 이었다.


  “우리 안가로 가죠.”


  굵고 커다란 선글라스 알 속에 눈동자를 숨겨 무슨 표정을 짓고 있는지 영 알수 없는 제인이 비화기를 잡고 그렇게 말했다.


  “아저씨 아줌마들도 몇 번 와봐서 알겠지만, 우리 안가는 전시엔 싹 청소하고 다른 데로 옮기기로 되어 있지 않습니까? 어차피 지금 ‘작업’중인 것으로 아는데, 이번 난리통이 잘 수습 되어도 앞으로 거기서 살긴 글러 먹었잖아요. 지하실도 넉넉한데, 공간 썩힐 이유는 없죠. 마지막으로 한 번 써 먹어 보죠.”


  돌아가는 꼴이 뭔가 좀 주먹구구식이다 싶었지만, 충분한 계획을 준비하지 못 한 채 급조된 작전이라 여기 저기서 사소한 트러블이 펑펑 터지고 있었다. 이번에도 그렇게 좋게좋게 급조 플랜 B를 실행에 옮기려 정겨운 우리집에 와보니 이미 집은 우리가 알던 그 모습이 아니었다.


  “뭐야 씨발. 여기가 베이루트야, 벨파스트야?”


  “벌써 러스키들이 쳐들어 왔는데요. 이야, 살아있네.”


  먼저 도착한 CIA의 먹물 하나가 베를린 오피스에서 데려온 해병 몇 명을 데리고 동네 방네 소문 다 나게 일을 치르고 있었다. 시민들의 통행 편의 따위는 고려하지 않고 경박하게 주차 된  험비의 해치 위로는 기관총을 두 손으로 꼭 쥔 해병 하나가 살벌한 눈빛으로 여기저기를 쏘아보고 있었다. 마당 쪽에서 피어오르는 연기의 정체야, 아까 위에서도 언급했으니 적당히 넘어가도록 하자.


  “이야, 이웃집에 미안해지네. 그동안 숨 죽은 듯 살아왔는데.”


  미처 주차장 도어가 개봉되기도 전에 담장 안쪽에서 들리는 결코 작지는 않은 폭발음을 들으며 앨런이 혀를 찼다. 


  그동안 안면도 없이 지낸 친절한 독일인 이웃들이 그 매캐한 연기에도 불구하고 창문이랑 창문은 다 열어 놓고 우리 안가 쪽을 보며 웅성거리고 있었다. 몇몇 용기 있는 시민들이 카메라나 캠코더 따위를 꺼냈다가 아무렇잖게 가택 침입하는 해병들에게 필름과 비디오 카세트를 훼손당하는 모습이 여기서도 보인다. 어이구, 미안해라.


  “그러게 말이다. 벌써 전쟁 난 줄 알겠네.” 난 그렇게 대답하며 옆문을 열어 젖히고 승합차 바깥으로 몸을 뺐다. 열린 차고 문 안으로 검은 세단이 미끄러지듯 천천히, 여유 있게 굴러 들어가는 폼새가 이 폭력적인 환경에 비해 퍽 세련되게 보였다.  “일 처리를 허투루 하지는 않는 거 같아 안심이네.” 내가 말을 마저 이었다.


  “이봐, 해병! C4는 천천히 준비해도 돼! 일단은 거기 캐비넷에 든 서류철들 싹 비워와. 그래, 빨간 서류철들 말이야!”


  들어 오기 전부터 짐작 했듯이, 안가 주변 경계고, 문서 파기작업이고 모두들 해병들이 지나치게 의욕적으로 덤벼들어서 우리가 뭘 거들어 줄 필요는 없어 보였다.  불필요하게 의욕적인 경우엔 이런 경우를 대비해 CIA쪽과 종종 모의 연습을 해 두었던 터라 이미 먹물들이 잘 통제하고 있었다. 우리는 그냥 옷을 갈아 입었다.


 그렇게 옷이 더러워지거나 땀이 난 것도 아니라 살짝 고민했지만, 그래도 시국이 워낙 뒤숭숭하니 입어둘 수 있을 때 미리 챙겨 입는 게 낫겠다 싶어 결국 전투복으로 환복하고 지하로 성큼성큼 발걸음을 옮겼다. 아까 전에 KGB 녀석을 질질 끌고 들어갔던지라 이제야 옷 갈아입고 재정비하러 올라오는 매튜와 조셉을 뒤로 하고 지하로 쿵쾅거리며 내려가니, 꽤나 그럴싸한 급조 심문실이 완성 단계에 이르고 있었다.


  의사들이 들고 다닐법한 왕진 가방같이 생긴 가방과, 이런저런 흉폭하게 생긴 공구류와 용도가 쉽게 짐작되어 더 끔찍한 연장들이 꽉꽉 들어있는 스포츠 백이 한구석에 널부러졌고, 불을 꺼두어 어둠침침한 가운데 우리의 주인공이 묶여있는 의자를 향해서만 무지막지한 광량의 조명이 가시광선을 쏘아대었다. 


  “수고 많았어요. 별 일 없던 거 같아서 더 좋네요.”


  자기들끼리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던 CIA의 마티와 NSA의 제시카가 나와 제인을 보고 반갑게 맞이했다.


  “예. 그 쪽 정보가 이번엔 꽤 괜찮더군요.” 나는 그저께 저녁 무렵의 불만을 조금 섞어 입을 열고 NSA쪽에게도 말을 건넸다. “새로 온 후임자 분은 안 보이네요?”


  “누구 한 명은 사무실에 남아 있어야죠. 생긴 건 그 모양이어도 꽤 똘똘한 편이거든요. 아, 제인. 어서 와요.”


  “아까 전에도 봐 놓고 뭘 새삼스럽게. 그나저나 곧 일어날 시간인데, 준비는 다 끝난 거에요?”


  뒤늦게 쿵쾅거리며 내려온 제인이 내려오면서 낸 거친 소음에 어울리지 않게 속삭이듯 나직하게 말하자, 의기양양한 표정의 제시카가 안경을 고쳐 쓰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 ‘추운 나라에서 온 스파이’ 친구가 일어나기만 하면 되죠. 자, 다들 자리 옮기세요, 첫 번째 순번은 저니까.”


  이 녀석이 일어나는 데엔 몇 분의 시간이 더 걸렸다. 짧은 시간 안에 방 안 여기저기에 설치해둔 비디오 카메라와 마이크는 어느새 심문 과정을 지켜볼 수 있게 개조된 구석 세탁실 안에 설치한 텔레비전을 통해 다각도로 고문기술자들의 새 장난감이 될지도 모를 누군가를 보여주고 있었다. 


  녀석이 입에서 신음소리를 흘리며, 고개를 천천히 들었다가 고개를 돌렸다. 몸을 온전히 사용할 수 있었더라면 도망칠 생각보다 먼저 반사적으로 손으로 눈을 가리려고 했을 터였다.


  대화는 일체 러시아어로 진행되고 있었다. 모두들 러시아어는 어느 정 도 할 줄 알고, 복잡한 말은 우리의 우크라이나 이민 2세 자녀, 조셉 코왈스키 중사가 무보수로 동시 통역을 해 줄 터인지라 큰 문제는 없었다. 대충 이런 대화 내용이었다.


  [ - 제기랄……. ]


  [ - 정신이 좀 드시나봐요? ]


  우리의 표적은 고개를 절레절레 젓더니, 나직한 목소리로 중얼거리듯 말문을 텄다.


  [ - 미국인? 그래, 그 권총… 썅 …, 된통 걸렸네. ] 


  [ - 중요한 건 우리가 어디 사람인지가 아니라, 당신이 어디 사람이냐, 겠죠. 그렇지 않나요? ] 제시카가 한 템포 쉬고 말을 이었다. [ - 볼로쟈. ]


  [ - 볼로쟈… 흥, 당신들, 헛다리 짚었어. ] 표적은 뻔히 보이는 수작을 부렸다. 사람이 모자라서 전문 심문기술자 대신 ‘좋은 형사’역할을 떠맡은 제시카 조차도 코웃음을 칠 수작이었다. 당연히 완전히 무시당했다.


  [ - 마음대로 지껄여봐요. 볼로쟈. 본명은, 음, 너무 안일한거 아냐? 블라디미르 블라디미로비치 푸틴. 현 KGB 소령. 서베를린에서 상주하며 정보수집과 서방권 좌파 게릴라와의 접촉 창구역할을 수행하고 있던 거, 맞죠? ]


  [ - 할멈, 뭘 단단히 착각하고 있는 거 같은데, 볼로쟈는 이미 여길 뜬 지 오래야. 이 난리통에 그 녀석이 아직도 여기 있을 줄 알아? ]


  어느새 온전하게 정신을 차린 듯 목소리도 커지고, 발음도 또렷했다, 다시 말하자면, 정신도 점점 또렷해 져서, 어떻게던지 말을 만들어 이 구멍에서 빠져나갈 수작을 부릴 터였다. 


  [ - 호오, 공들여 만든 위장신분, 한번 써 먹어보긴 해야겠다 싶은거죠? 계속 지껄여 봐요. 어디까지 말 되는지 일단 한번 들어나 보죠. ] 


  [ -할멈, 내가 그렇게 쉬워보여? ]


  [ - 내 나이 아직 한참인데 말 한번 참 섭섭하게 하네요. 지금 당신이 믿을 사람은 나밖에 없는데. ] 제시카는 속삭이듯 말했지만, 내가 보기엔 영 시원찮아 보였다. [ - 지금 밖에선 당신을 못 잡아먹어서 안달인 녀석들이 한둘이 아니라서 말이죠. ] 옆에서 앨런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너무 뻔한 래퍼토리 아냐?” 


  “그러게나 말이다. 그냥 심문 기술자 올 때 까지 기다렸다가 하는 게 나았을 거 같은데.”


  어느새 KGB 녀석은 입에서 비릿한 미소를 흘리며 받아치고 있었다. 


  [ - 아니 글쎄, 할멈이 뭐라고 말을 해도, 내가 뭐 달리 해 줄 말이 있어야지. 뭐 방법이 없는건 아닌데…  한번 들어 볼래? ]


  그 뒤야 뭐, ‘얼굴 한번 보여 줘 봐라. 봐서 반반하면 한번만 대 줘 봐라. 그러면 생각해보지.’ 이런 말에 제시카는 오른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아마 살짝 쓴웃음을 지었을거다. 그녀가 대충 ‘이따 다시 보자’는 말을 던지고는 천천히 심문실을 나와 이쪽으로 걸어왔다. 문을 닫은 그녀가 마티에게 말했다.


  “이제 나쁜 경찰이 한번 힘 좀 써 보셔야겠는데.”


  그 뒤로 한 십 몇 분은 뭐, 말소리가 없었다. 가끔 볼로쟈인지 뭐시긴지가 욕으로 들리는 무언가 단어를 우물거리긴 했지만 말을 마무리하기도 전에 주먹과 몽둥이와 발길질이 날아들었다. 그 어떤 자기소개나 한마디 말도 없이 시작된 구타였다. 


  말 한마디 없이 계속되는 구타는 그저 맛보기일 뿐이라는 듯, 마티는 처음부터 끝까지 말 한마디 없이 몸으로 대화를 대신했다. 다시 제시카의 차례가 찾아왔다.


  [ - 거 봐요. 우리가 지금 뭐 군사기밀을 달래요, 나라를 팔아 먹으래요? 그냥 당신 이름 몇 글자랑 신상이 우리가 아는 거랑 맞냐. 이거만 확인 해 주면 되는거 아녜요. 이야기는 아직 시작도 안 했는데 벌써부터 진을 빼고. 한심하게. ]


  [ - 거 참, 민주주의다, 인권이다, 입만 열면 떠들어대더니, 부끄럽지도 않아? 시바 내가 졌다, 졌어. 다 사실대로 말 할께. ]


  [ - 허튼 수작 부리면 국물도 없어요. 내가 봐주고 싶어도 내 윗대가리가 가만히 안 놔둔다고. 그래, 말 좀 해봐요. 이름이 뭐에요? ]


  [ - 근데… 나 진짜 볼로쟈 아니야. 걔는 이미 떠났어. 진짜야. 난 그저… 그 녀석 통역이란 말이야. ]


  [ - 통역? ]


  기가 막히는 대답에 기가 찬다는 반응이 나왔다, 그러거나 말거나 그 녀석의 반응은 무척 진지했다. 마치 믿어 달라고 호소하는 것 같았다. 이미 답안지를 제출받은 입장에선 호소력 없는 호소일 뿐 이었다.


  [ - 그래. 난 러시아 사람도 아니야. 당신이 러시아말로 자꾸 말을 거니까 그걸로 말 하는 거지. 사실 볼로쟈 걔는 독일에서 일을 별로 안 해 봐서 아직 말이 서툴거든, 그래서 슈타지에서 임시로 날 꽂아 준거야. 독일어 선생 겸 통역으로 말이야. ]


  너무나 궁색한 변명이라 취조실 상황을 지켜보던 좁은 세탁실 안의 여러명이 전부 피식 쓴 웃음을 쪼갰다. 제시카가 어둠 속으로 들어간 다음, 카메라 쪽을 향해 고개를 돌리고서 고개를 휘휘 저었다.


  [ - 아, 볼로쟈. 당신 말이야. 당신… 아직 덜 맞은 거 같은데. ]


  대화가 대충 마무리 되고, 다시 몸의 대화가 이어졌다. 여기서 우리가 이미 뻔히 알고있는 개인 신상따위에 연연하는 이유는 간단했다. 지금 기를 팍 꺾어서, 자기 입으로 무언가 기밀을 실토하게 만들어야, 그 뒤의 취조가 쉬워지는 법이었다. 와이셔츠 단추를 풀고 팔을 걷어 부친 마티가 들어와서는 살짝 땀이 젖은 머리를 손으로 훓으며 툴툴댔다. “이래서 비싼 돈 주고 심문기술자 따로 쓰는 거지. 옘병.”


  다시 제시카가 들어왔을때, 의외로 먼저 입을 연 것은 볼로쟈였다.


  [ - 지금 시간이 몇 시지? ] 


  [ - 훗, 그걸 내가 미쳤다고 알려 줄 거 같아요? ] 


  [ - 굉장히 중요한 문제인데. 할멈 목숨이 걸린 일일지도 몰라. 정말루. ]


  그는 여기서 잠깐 숨을 고르고, 말을 잇기 시작했다.


  [ - 본론으로 들어 가자고. 당신들이 진짜 알고 싶은 게 내 진짜 신분 따위 일리가 없잖아? 어디 내가 그 녀석이라고 가정 해 보고, 하고 싶은 질문이 있으면 직접 물어 보란 말이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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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고 살기 힘들어서... 더군다나 연말연시는 대목이라 시간이 잘 안 나네요....


이제 슬슬 '작계 V'의 정체를 까발릴때도 다가왔죠.

Chapter 002: 서베를린은 왜인지 흐림 -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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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시 제시카가 들어왔을때, 의외로 먼저 입을 연 것은 볼로쟈였다.


  [ - 지금 시간이 몇 시지? ] 


  [ - 훗, 그걸 내가 미쳤다고 알려 줄 거 같아요? ] 


  [ - 굉장히 중요한 문제인데. 할멈 목숨이 걸린 일일지도 몰라. 정말루. ]


  그는 여기서 잠깐 숨을 고르고, 말을 잇기 시작했다.


  [ - 본론으로 들어 가자고. 당신들이 진짜 알고 싶은 게 내 진짜 신분 따위 일리가 없잖아? 어디 내가 그 녀석이라고 가정 해 보고, 하고 싶은 질문이 있으면 직접 물어 보란 말이야. ]



- 14 -


  볼로쟈는 자신의 몰골이 엉망일 게 틀림 없다고 생각했다. 아마 양 눈가는 시퍼렇게 멍이 들다 못해 머리에서 피가 줄줄 흐르고 있을 터였고, 아까 입 안에 감돌던 이물감과 잇몸의 통증, 침을 뱉었을 때 같이 나온 물체를 보아 이빨도 두어 개 날아 간 것이 틀림 없었다.  


  하지만 지금 정신은 멀쩡했다. 사실 그가 몸을 희생하면서 신분을 끝까지 털어놓지 않은 이유는 따로 있었다. 그저 자신의 신분이 기밀 사항에 속한다는 1차원 적인 이유 때문은 절대 아니었다. 그리고 그는 지금 자신이 알고자 하는 것을 역으로 알아 볼 생각이었다. 설령 여기서 나가지 못하게 되더라도, 꼭 해야 할 일이 생겼기 때문이다.


  “본론으로 들어 가자고. 당신들이 진짜 알고 싶은 게 내 진짜 신분 따위 일리가 없잖아? 어디 내가 그 녀석이라고 가정 해 보고, 하고 싶은 질문이 있으면 직접 물어 보란 말이야.”


  제시카는 살짝 당황했다. 이 녀석 지금 무슨 수작을 부리는거지. 하지만 이 녀석의 눈은 아까 전의 자신을 놀리고 이빨이 나가도록 두들겨 맞을 때의 눈빛이 아니었다.  일단 한번 대화의 물꼬를 터 볼까. 


  심문이라는 것도 결국 상호간의 커뮤니케이션이고, 빠져나갈 길이 없이 계속되는 폭력과 고문은 취조 대상자의 협조를 이끌어 내기보단 적개심만 높이는 경우가 많다는 것은 상식 중의 상식이었다. 슬슬 대화를 할 때도 되었다고 생각한 제시카는 잠시 세탁실에 다녀왔다. 이번엔 다시 제시카가 먼저 시작했다.


  “그래, 할 말은 정리 했어요?”


  “뭐, 대충. 그쪽은, 이쪽의 질문에 대답할 수 있는가? 듣자 하니 -  날 족치고 싶은 녀석들이 아주 많다면서.”


  “중요한 것은, 그 사람들이 아니라 당신과 우리이죠.”


  “쓸 데 없는 말은 집어 치우자구, 제시카.”


  볼로쟈, KGB의 블라디미르 블라디미로비치 푸틴 소령은 냉소하며 쏘아 붙였다. 영어로 쏘아 붙였다. 갓 정계 입문한 정치 초년생 하원 의원이 구사하는 것 같은, 동년배의 교양 있는 사회 지도층이 구사할만한 깔끔한 미국식 영어였다. 


  상대방의 정체는 목소리를 듣고 있던 순간부터 이미 간파하고 있었다. 베를린 오피스 주재 NSA의 선임 정보분석관. 물론 어떻게 생긴 여자인지도 잘 알고 있었다. 한번 대 달라고 했던 것도 어느 정도는 진심 섞인 농담이었다. 물론 그것이 이뤄질 가능성은 0에 수렴한다는 것 역시 익히 일고 있었지만, 중요한 것은 그런 지엽적인 문제가 아니다.


  자신의 실명을 언급 당한 제시카가 당황하는 것이 빛과 그림자의 장난이 빚어 낸 시야 장애로 인해 보이는 어렴풋한 실루엣 만으로도 충분히 느껴졌다. 보아하니, 지금 저 쪽엔 딱히 밥값 하는 전문가가 없다. 여기서 한방 더 먹여 주면 보다 편안한 대화가 가능할 것이다.


  “그래. 내가 바로 당신들이 생각하는 그 사람 맞아. 블라디미르, 블라디미로비치, 푸틴, 1952년 7월 10일생, 현 KGB 소령. 서류로는 드레스덴 지부의 연명부에 이름을 올리고 있지만, 실제로는 바로 이 도시에서 정보 수집과 서방 혁명 동지들에 대한 연락 업무를 겸임하고 있지. 나는 내 정체를 정확하게 당신들에게 밝혔다. 당신들도 대화를 하고 싶다면, 저 빌어먹을 스포트라이트부터 끄고 사람답게 전등불을 켜는 게 어떻겠나? 지금 당장!”


  마티는 고민하다가 명령했다. 심리적 위압감을 위해 준비한 장난감들이 제 역할을 못하고, 일반적인 형광등 불이 들어왔다. 볼로쟈의 눈에 아직 평정심을 잃지 않으려는 검은 생머리의 미인이 눈에 들어왔다. 실제로 보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자리가 조금 누추한 것 같지만, 반갑소. 방금 말한 대로요. 내가 볼로쟈. KGB의 푸틴 소령이요. 많이 분위기가 상했지만… 동업계 종사자로서, 반갑구만.”


  “… 내가 그 사람이라고 말 해 줄 수는 없어요.”


  “순순히 대답해 줄 거라고 말 하지도 않았지. 나도 이유가 없었다면 여기서 당신들이 하루 종일 두들겨 패도 내 정체를 공개할 생각이 없었소. 다른 방에도 사람들 있지 않나? 내게 치과의사 소개해줘야 할 그 썅놈의 상판때기가 조금 궁금하구만.”


  “그 썅놈 바로 여기 있다. 내가 누군지는 이미 잘 알고 있겠지?”


  “당신이나 제시카나 근본은 화이트니까, 그 정도는 누워서 떡 먹기지. 마티, 네놈이 날 직접 두들겨 팼다니 이거 황송하기 짝이 없구만. 나 KGB의 푸틴이오. 일단은, 대화를 좀 해 봅시다. 당신들도 서 있지만 말고, 의자라도 가져다 놓고 말이야. 그 쪽은 사지 멀쩡하잖아?”


  해병 몇 명을 시켜서 의자와 테이블을 가져왔다. 비록 손이 뒤로 묶인 상태는 여전했지만, 그래도 아까보다 훨씬 편안한 분위기가 제법 마음에 들은 볼로쟈는, 눈탱이 밤탱이가 된 얼굴에 슬쩍 영업용 미소를 띠며 말을 이었다.


  “그래… 이제 좀 서로 허심탄회하게 이야기를 해 봅시다. 일단, 지금 몇 시요? 내가 정신을 잃은 지 몇 시간이나 지난 거지?”


  마티와 제시카가 서로를 쳐다봤다. 약간의 시선 교환 이후, 마티가 입을 열었다. 물론 거짓말이었다.


  “당신은 우리가 잡아 온 뒤로 3일 동안 잠만 잤어. 지금은 오전 11시 조금 넘었고.”


  볼로쟈는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절레 절레 저었다. 그리고 대답했다.


  “오, 그래? 그 동안 전쟁은 없던 거지? 그렇지?”


  “쿠바 미사일 사태 저리 가라는 긴장 상태지만, 아슬아슬하게 선을 지키고 있지. 핫 라인은 지금 불이 나고 있을걸. 아무튼, 당신들도 안 넘어오니 우리가 넘어 갈 이유가 없잖아. 그렇지?”


  “아, 그렇구나.”


  그리고 볼로쟈는 다시 표정에서 웃음기를 지웠다.


  “개 수작 부리지 말고 똑바로 씨부려. 방금 네 녀석이 한 말 두 가지중 하나는 분명히 거짓말이니까.”


  볼로쟈, 푸틴 소령은 다시 한번 진심으로 열 받기 시작했다. 이 병신들은 기껏 멍석을 깔아 놓아도 같잖은 장난질이나 하고 있었다. 이런 말장난이나 할 요량이었다면, 그는 차라리 일주일 내내 구타 당하는 것을 견디는 편이 속 편했다. 두 손이 멀쩡했다면 테이블을 두 주먹으로 쾅  후려쳤을 것이다. 볼로쟈는 애써 자신을 진정 시키며 말을 이었다.


  “당신들은 정말 뭐가 궁금한 지 말 할 생각 없는 거지? 물어만 보면 내가 아는 건 전부 말 해 준다는 데도 왜 이런 식이지? 이건 그냥 시간 낭비야. 당신들이 귀중히 여기는 돈보다 더 귀중한 시간! 당신 말대로 3일이 지났다면, 이미 전쟁이 시작 됐겠지만, 어떻게든 협상 테이블을 준비할 수라도 있을 테고, 만약 아직 전쟁이 벌어지지 않았다면, 지금은 아직 내가 끌려온 지 네 시간도 안 지났다는 이야기니까!”

  

  미국인들은 몹시 당황스러웠다. 그들이 알고 있는 < 작전 계획 V  >는 엄연한 방어 계획이었고, 지난 몇 년 간 GSFG만의  단독 군사 도발의 위험성에 대한 이야기가 일부의 입에서 오가고 있었지만 지금처럼 서방 국가들이 전부 정신을 차리고 미국마저 동원령 선포를 고민하는 단계 에서면 그들만의 기습 공격 역시 전혀 전략적, 전술적 의미가 없었다.


  그런데, 지금 이 KGB 소령은 모두가 바라지 않는 전쟁을 기정사실로, 그것도 구체적인 시간까지 언급하며 현실적인 위협으로 여기고 있지 않은가?


  “음, 이봐 볼로쟈. 일단 거짓말을 한 점에 대해서는 정말 미안하게 생각하네. 내가 도대체 왜 빨갱이에게 미안해야 하는 지는 아직도 이해할 수 없지만…….”


  “이봐 아메리끼, 난 고르바초프같은 철부지가 아니야. 당신들이랑 대화를 해서 우리 조국이 얻은 게 뭐가 있는지도 모르겠고. 하지만 이거 하나는 확실해. 지금은 그 양반이 좋아하는 대화를 안 하면…….”


  “아, 진짜. 개소리 좀 그만 하면 안 되겠어? 무슨 잔꾀를 부려서 우릴 엿 먹일 생각을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우린 지금 24시간 동안 너희 빨갱이들이 벌이는 정치 싸움질 뒤치다꺼리 하는 것 만으로도 피곤해 죽겠으니 말이야.”


  마티의 생각으로는 지금까지 배려 해 준 것 만으로도 엄청난 호의를 베푼 것이었다. 상대가 대화의 물꼬를 트려는 것 같아 기껏 호의를 보여 줬더니 결국 애매한 말장난으로 사람을 농락하려는 것이 틀림 없어 보였지만,


  “미안하지만 나도 네 녀석 상대로 말장난 할 만큼 한가하지 않아. 이러다간 24시간 뒤에 내 고향에 핵폭탄이 떨어 질 지도 모르니까!”


  “대단한 사명감을 품에 안으셨구만. 그래, 방금 궁금한 게 생겼어. 네 녀석은 무슨 꿍꿍이가 있길래 우릴 붙잡고 대화를 시도하는거지?”


  “위대한 사회주의 조국 소비에트 연방과 너희 파시스트 돼지새끼들의 전면전을 막고자 함이지. 사실 당신들까지 붙잡고 이런 이야기를 하고 싶진 않았지만, 내 윗대가리들은 꽉 막혔고, GSFG에 말 해 주기엔 이미 시간도 장소도 영 글러 먹은 듯 하니 말이야.” 이미 무언가 각오를 한 볼로쟈의 말에는 막힘이 없었다. “전쟁을 막기 위해서라면, 나는 이번 사건에 관련해서 내가 아는 모든 것을 말해 줄 준비가 되어 있다. 설령 조국에서 나를 반역자라고 부를지라도 말이야.”


  마티와 제시카는 주제를 모르고 너무나 당당한 빨갱이가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지 조금은 호기심이 생겼다. 제시카는 혹시나 하는 심정으로, 지금 본사에서도 파악을 못 하고 있는 모스크바의 이야기를 시작했다.


  “쿠데타의 주체는 누구죠?”


  잠깐 주저했지만, 결국 볼로쟈는 입을 열었다. 


  “… 쿠데타라는 점 까지는 파악 하고 있군. 좋아… 이번 불장난을 기획한 것은 KGB와 붉은 군대 총참모부, 그리고 공수군과 전선공군, 육군 일부 장성들이야.”


  복잡한 마음 속을 들여다 볼 방법이 없는 제시카와 마티는 일단은 들어나 보자는 느낌으로, 차분히 이야기를 진행시켰다. 그리고 서서히 그들과 그들의 상전이 예상한 것과는 조금씩 다른 이야기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쿠데타를 벌인 이유는? ”


  “글쎄… 생존 본능이란 표현이 정확하겠군.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먼저 한번 뒤엎어 보자는 것이 가장 큰 이유이자, 첫 번째 이유였으니까.”


  현 정권의 대화 노선에 반발한 군 내 강경파 일부가 주축이 되었을 것이라는 본사의 추측을 기반으로 생각하고 있던 일련의 미국인들에게는 발상의 전환과도 같은 신선한 소재의 이야기였다. 제시카는 질문의 깊이를 조금 심화시켰다.


  “그런 이유 뿐인건가요? 다른 정치적인 이유는 없고?”


  “당장 목숨이 달아날 판인데, 다른 이유가 필요하겠나?”


  볼로쟈는 어느새 본인의 포커페이스를 살리기 시작했다.


Chapter 002: 서베를린은 왜인지 흐림 -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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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쿠데타를 벌인 이유는? ”


  “글쎄… 생존 본능이란 표현이 정확하겠군.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먼저 한번 뒤엎어 보자는 것이 가장 큰 이유이자, 첫 번째 이유였으니까.”


  현 정권의 대화 노선에 반발한 군 내 강경파 일부가 주축이 되었을 것이라는 본사의 추측을 기반으로 생각하고 있던 일련의 미국인들에게는 발상의 전환과도 같은 신선한 소재의 이야기였다. 제시카는 질문의 깊이를 조금 심화시켰다.


  “그런 이유 뿐인건가요? 다른 정치적인 이유는 없고?”


  “당장 목숨이 달아날 판인데, 다른 이유가 필요하겠나?”


  볼로쟈는 어느새 본인의 포커페이스를 살리기 시작했다.



 - 15 -

  

    “당신들이 보기엔 천사가 따로 없을 미하일 고르바초프 서기장 동지께서 일을 꾸미게 된 근본적인 원인은 아마 브레즈네프 시절로 거슬러 올라가야 할 것 같군.”


  양 손목이 의자에 결박된 꼴사나운 모습이지만 서방측의 그 누구도 모르는 이야기를 차분히 전개해 나가는 그의 목소리는 침착했다.


  “당신들은 너무나도 잘 알고 있겠지만, 우리 소련 체제에 문제가 없다는 말은 할 수 없소. 요 근래 들어 생긴 그러한 문제들의 태반은 과거 브레즈네프 동지 시절의 경제정책에서 비롯된 문제들이 수습 불가능할 지경으로 커진 것들이 대부분이고 말이지.”


  사상성이 투철한 KGB의 공작원 입에서 나올 이야기라고는 믿기 힘든 이야기는 소재의 신선함을 한껏 살려주었다.  어느새 마티는 비릿한 미소를 띠며 팔짱을 끼고 있었다. 볼로쟈는 이제, 무어라 묻기도 전에 알아서 말을 이어가고 있었다.


  “현 서기장이 이러한 문제들을 해결하자고 절치부심하고 있다는 것은 모두들 잘 알고 있을 거요. 그런 서기장이 대 숙청을 계획하게 된 가장 큰 원인은 역시 체르노빌 원전 사고였지.”


  “대숙청? 지금 고르비가 스탈린 놀이를 계획 중 이었다는 말을 하려는 건가?”


  “왜, 믿어지지 않는 건가? 한번 곰곰히 생각해 보시지. 지금의 서기장을 중앙 정계에 데뷔 시킨 인물이 바로 누구였는지.”


  “유리 안드로포프 전 공산당 서기장…….”


  “전 KGB 국장이기도 했었고 말이야.” 볼로쟈가 말을 자르며 들어왔다. 그의 눈빛은 마치 고르비를 ‘대화가 통하는 민주적인 지도자’로 보고 있던 서방 정계의 시선을 조롱하는 소련을 대표하는 듯 한 느낌을 주고 있었다. ‘어디까지 이야기 했지?’ ‘체르노빌.’ 볼로쟈는 다시 이야기를 곁다리에서 본론으로 돌렸다.


  “그래, 체르노빌 원전 사고, 중대한 환경 재앙이자 비극이었지. 고르비는 이 때부터 이상한 생각을 갖기 시작 했고 말이야.” 지금, 고르비에 대해 볼로쟈가 말하는 내용은, 서방 측의 그 어떤 기관에서도 파악하지 못한 중요한 내부 동향에 대한 이야기였다.


  “그가 그 무렵에 무슨 생각을 품게 되었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소위 말하는 보수적인 위치에 있는 주요 인사들을 제거해야겠다는 생각을 시작한 게 이 때 즈음이라는 것은 거의 확실하다고 하더군. 겸사겸사 자신의 앞길에 방해가 되는 정적들까지 손을 볼 계획이 그렇게 만들어 졌소. 아마 이런 감각은 유리에게 배워 온 거였겠지. 다만 제대로 배울 틈도 없이 유리가 죽었을 뿐이고.”


  점점 마티의 표정에서 비릿한 미소가 지워지기 시작했다. 세탁실에서 이야기를 엿듣고 있는 델타의 서베를린 HRT 인원들을 포함해서, 이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자리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홀린 듯이 의자에 단단히 결박된 KGB 소령의 진술을 경청하고 있었다. 어쩌다 보니 전혀 듣고 싶지 않은 이야기를 듣게 된 지하실 입구의 두 해병대원의 뒷통수에 식은땀이 줄줄 흐르고 있었다.


  “GRU를 이용해서 군 내부와 KGB, 그리고 일부 정계 인사들까지 몽땅 당원 명부에서 지워버리겠다는 계획은 그 원대한 야망에 비해 허술한 구석이 좀 있었고, 오래지 않아 우리 국장 님의 귀에 들어가게 된 거야. 여기서부터 지금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든 모스크바 쿠데타가 시작된거지. 제거 대상으로 살생부에 이름이 실린 자들 끼리 상부상조 하면서 훈훈하게.”


  “그 결과가 간밤의 모스크바 총격 사태라, 그 말이군요? 그러면 현재 소비에트 연방의 군 통수권을 쥐고 있는 쿠데타 세력은 서방에 대한 군사 도발의 의도가 전혀 없다는 이야기인가요? 그러면 GSFG에게 지금 당장이라도 사실을 알려야죠. 당신들이야 내부 정치 사정으로 혼란스러워진 안보 확립을 위해 이 정도 조치를 용인할 수 있다고 생각 할 지도 모르겠지만, 지금 우리 측의 생각은 조금 다르다구요.”


  볼로쟈가 기다린 순간이 바로 지금이었다. 자신의 진술을 진지하게 경청하고 있는 이들에게 사태의 심각성을 인지 시킬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우리 윗대가리들의 계획은 단순했지. 간밤에 고르비를 강제 연행한 뒤, 다음날  남들 보기엔 적법한 절차를 거쳐 고르비의 사임 절차를 진행 시킨 뒤 후계자로서 우리 쪽의 입장을 대변할 적당한 간판을 세워서 전광석화처럼 일을 끝낸다는 것이었지. 다만 그 과정에서 생각 외로 일이 시끄러워 진 게 문제였던 것이고.”


  “붉은 광장에서의 대규모 교전을 말하는 것인가?”


  “거기에서 뿐만이 아니었지. 그리고, 그 바람에 잠깐이면 충분했을 모스크바와 외부와의 통신 차단이 생각보다 길어진 것이고, 이들을 어떻게 설득해야 한다는 구체적인 계획이 없었던 총참모부와 KGB가 애매한 태도를 견지하는 사이, 일이 이 지경까지 이르게 된 거야.”


  “잠깐만, 그래봤자 결국 GSFG가 실행에 옮긴 것은 < 작계 V >잖아. 결국 당신들 통제에서 벗어난 녀석들도 방어 작전을 준비하고 있을 뿐인데. 이 정도는 이제 서로 대화하면서 풀어나가면 오해가 풀릴 문제 아닌가?”


  “ … < 작계 V >를 실행에 옮겼다는 이야기를 듣고도 지금 이러고 있었다는 이야기야?” 볼로쟈는 고개를 설레설레 내저었다. “아냐. 당신들, 당신네 CIA가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고 있다면 절대 그렇게 말하지 못 해. 멍청한 미국 놈들… 배때지에 기름만 낀 아둔한 자본가들 같으니라고!”


  “지금 당신 무슨 말 하는 거야? < 작계 V >는 방어 작전 계획…….”


  볼로쟈의 떨리는 목소리가 담고 있는 의미를 종잡을 수 없는 내용에 제시카가 무어라 말했다. 보아하니 이미 제시카가 가지고 있는, 서방 세계가 가지고 있는 정보는 아무 짝에도 쓸모 없는 정보임이 틀림 없었다. 


  “당신들이 생각하는 방식의 방어 작전을 구상한 경우도 가끔 있었지. 하지만 말이야…

 자네는 유태 돼지들이 아랍 전체의 군사력을 붕괴시키고 시나이 반도와 예루살렘 반쪽을 마저 장악한  3차 중동전의 개전 과정을 알고 있는가?”


  잠깐 모두가 할 말을 잃었다. 물론 이 자리의 모두들은 미국이 베트남 문제로 골머리를 썩히던  1967년 중동에서 벌어진, 마치 낮에 작렬하는 사막의 태양빛처럼 짧지만 너무나 강렬했던 일 주일간의 대규모 전면전의 개전 과정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군사력에서 중동 각국에게 완벽한 열세에 놓여있던 이스라엘이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지금까지도 각국에서 이것을 침략으로 해석해야 하는지 논란이 일고 있지만 그래도 현실적으로는 다른 선택지가 없었던 국가 전략, ‘예방 전쟁’ 뿐이었다.


  “대 조국 전쟁 이래 꾸준히 다져진 실전 경험과, 변증법적 유물론에 기반한 소비에트 군사 과학이 생각하는 ‘방어 작전’역시 이와 유사했지. ‘공격 선취에 의한 주도권 확보!’ “


  잠시 열변이 잦아드나 싶더니 다시 말이 계속 이어졌다.


  “국가 단위의 방위전략으로 예방 전쟁 개념을 천명한 이스라엘의 경우는 우리와는 물론 경우가 조금 많이 다르기는 하네.아무튼, 당신들도 < 작계 V >의 개념은 알고 있겠지. 유사시 군 사령부 단위에서 수행하는 국지적인 방어 작전. 이것이 < 작계 V >의 기본 개념이야. 뭔가 지금 GSFG가 처한 상황과 유사하지 않나?”


  볼로쟈는 갈증을 느겼지만 두 손이 결박 되어 있었다. 물을 먹여 달라고 하기엔 가오가 안 살았다. 결국 그냥 무시하고 열변을 마저 잇기로 작정했다.


  “지금 GSFG는 군 사령부 단위 이상에서의 작전을 수행할 능력을 완전히 거세 당했지. 모스크바는 전혀 연락이 안 되다가  이 마당에서 서방 측이 명백하게 우월한 타이밍에 군사적 행동을 보여주기 시작했네. 쿠데타에 대해선 일언반구 언급을 듣지 못했던 GSFG 수뇌부는 지금 이 사태를 서방 국가의 명백한 침공 징후로 간주하고 있어. 이들은 자신들 전체를 희생하는 한이 있더라도, 전혀 승산이 없는 군 사령부 단위의 독자적인 예방 공세를 실행에 옮겨 조국 방위에 필요한 최소한의 시간을 마련할 작정인거야. 자신들의 화력, 물자, 연료, 그리고 병사에서 장군까지 모두의 육신까지, 모든 것을 갈아 바쳐서라도!”

  

  어설픈 정보력과 억측으로 만들어낸 조잡한 정세 및 적 동향 예측, 그리고 그 결과가 가져올 파란을 머리 속에 그려낸 모든 이들이 몸서리를 쳤다. 물론 현장에서 열심히 발로 뛰는 이들의 잘못은 아니었다. 


  이들은 본국의 본사들이 명령한 대로 가용 가능한 자원 내에서 최대한의 능력을 뽑아내어 보고했을 뿐이고, 결국 국가 단위의 군사력 운용에 대한 마스터 플랜을 수립하고 실행한 것은 본사의 정보 분석을 토대로 가장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결론을 내린 본국의 군인과 정치가들이었다.


  그리고 사회주의 계급 투쟁의 최전선에서 자본주의자들의 모든 전력이 집대성된 NATO와의 경계를 두고 대치하던 이들 주독소련군의 결정 역시 지극히 합리적이고 이성적이며 비장하기까지 한 결론이었다. 


  조국이 이미 현 상황에 대한 판단 능력을 상실 한 것이 확실한 시점, 서방 국가들의 대규모 침공이 확실시 되는 시점에서, 어차피 일어날 전쟁, 누가 보더라도 최종적으로는 확실히 만신창이가 될 것임을 알면서도 몸뚱이를 던져 조국의 수명을 조금이라도 연장하겠다는 이들의 각오 역시 나름대로의 냉철한 상황 인식과 군사적 판단이 내린 결론이었다.


  마치 1914년의 그 끔찍한 8월에, 철도 시간표가 분 단위로 짜여져 있던 슐리펜 플랜을 위시한 각종 동원 계획을 체계적으로 실행에 옮기던 유럽 각국의 정치가들과 군인들처럼.


  “그런데… 지금이 몇 시지?”


  “20시… 오후 여덟 시네요…….”


  푸틴 소령은 고개를 쳐 박았다. 그리고 다시 고개를 들었다. 몇 시간 사이 너무 많이 늙은 것 같았다. 


  “손 좀 풀어 주쇼. 담배 좀 핍시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누군가 주머니 칼을 꺼내 손목의 케이블 타이를 끊었다. 다리는 결박 되었지만, 손은 이제 자유로웠다. 라이터와 담배를 압수 당했던 볼로쟈는 마티의 담배를 빌려, 제시카의 라이터로 불을 붙였다. 연기를 들이마시고, 한숨을 내쉬듯, 허탈하게 내 뱉었다. 그의 입에서 듣고 싶지 않았던 말이 나오기 시작했다.


  “이미 늦었어.”


  동서 진영 곳곳에, 빌헬름 2세(Wilhelm II.)와 소(小) 몰트케(Moltke) 원수들이 있었다.


  하지만 1914년 8월의 어느 날, 독일군이 룩셈부르크 국경을 넘던 그 순간 그 둘의 심정을 느끼고 있는 것은, 서베를린 어느 주택가 지하실의 몇 명 뿐이었다.


  급조된 심문실 안에서, 만약의 사태를 대비해 경계를 서고 있던 두 해병의 얼굴빛은 너무나도 창백했다.



Chapter 002: 서베를린은 왜인지 흐림 - Outtr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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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손 좀 풀어 주쇼. 담배 좀 핍시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누군가 주머니 칼을 꺼내 손목의 케이블 타이를 끊었다. 다리는 결박 되었지만, 손은 이제 자유로웠다. 라이터와 담배를 압수 당했던 볼로쟈는 마티의 담배를 빌려, 제시카의 라이터로 불을 붙였다. 연기를 들이마시고, 한숨을 내쉬듯, 허탈하게 내 뱉었다. 그의 입에서 듣고 싶지 않았던 말이 나오기 시작했다.


  “이미 늦었어.”


  동서 진영 곳곳에, 빌헬름 2세(Wilhelm II.)와 소(小) 몰트케(Moltke) 원수들이 있었다.


  하지만 1914년 8월의 어느 날, 독일군이 룩셈부르크 국경을 넘던 그 순간 그 둘의 심정을 느끼고 있는 것은, 서베를린 어느 주택가 지하실의 몇 명 뿐이었다.


  급조된 심문실 안에서, 만약의 사태를 대비해 경계를 서고 있던 두 해병의 얼굴빛은 너무나도 창백했다.



* * *


 회사원들은 자기들끼리 정보를 맞춰 보고 있느라 정신 없었다. 현기증이 날 것 같은 나는 매튜의 손에 벤저민 프랭클린 한 장을 쥐어주고 잠깐 방에 올라간다고 행선지를 밝히며 세탁실에서 나왔다. 어차피 내가 도움이 될 단계는 지났고, 추후 상황에 맞는 정보는 먹물들이 지금 정리중인 내용을 들으면 될 터였다.


 아직 교차 검증 단계이긴 하지만, 신빙성이 높은 믿기 싫은 정보를 제공해 준 KGB의 볼로쟈나, 그 정보의 신뢰도에 대한 1차 평가를 마친 회사원들이나 다들 정신이 없어서 이쪽은 신경도 안 쓰고 있었다. 1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으로 발걸음을 옮기며, 나는 기묘하게 생긴 KGB 녀석의 두상을 잠깐 보았다가 시선을 돌렸다.


 “저기요… 이제 우리 모두 죽는 겁니까?”


 문을 지키고 있는 해병 두 녀석 중 하나는 오피스를 종종 지나다니며 나와 안면이 있던 녀석이었다. 녀석이 잔뜩 긴장한 얼굴로, 남들 귀에 안 들리게 조용히 내게 말을 걸어왔다. 두 시간 전의 나라면 ‘쫄지 마 새끼야.’하고 등짝을 탁 치고 나갔겠지만, 지금은 그렇게 확신에 찬 어조로 전쟁 가능성을 부정할 수가 없었다.


 “정신 바짝 차리고, 여기서 들었던 이야기는 밖의 누구한테도 이야기 하지 마. 빨갱이들이 잡아 가더라도. 알았지?”


 귓가에 대고 살며시 속삭이는 이야기에 녀석은 대답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어깨를 방탄모를 두 번 탁탁 두들기고 지하실 입구를 나와 계단을 밟고 위로 올라섰다.


 어느덧 시간이 꽤 흘렀지만 창 밖은 마당의 캠프 파이어 탓에 불꽃이 일렁이고 있었다.  이젠 언뜻 무한궤도가 끼릭끼릭 굴러가는 소리도 들리는 것이 사람 마음을 한층 심란하게 만들고 있었다. 이럴 때 흡연자들이 담배를 피우는 것인가.


 문서 파기 작업을 대신 해주던 CIA 직원들이 심문실에 내려가 본업에 집중하게 되면서, 해병들의 문서 파기 작업 진행 상황을 감독하고 종종 거들어 주고 있던 R팀 녀석들이 내게 달라붙었다.


 아래에서 뭐 쓸만한 이야기라도 나왔냐는 이야기를 내게 하고 있는 아직은 여유로운 인상의 그들이 보기엔 우거지상이 조금 섞여있을 내 얼굴 표정이 꽤 신경 쓰여 보일 터였다.


 “제군들, 빨리 짐 싸서 베를린을 떠날 준비를 해야 할 것 같아.”


 “지금 준비 하고 있잖아. 아니, 전시 작계 준비하란 이야기야 지금?”


 “아마 미리 준비 해 두는 게 좋을 거야. 그놈의 < 작계 V >인지 뭔지 하는 게 실은 예방 공세를 기본 개념으로 깔아두는 방어 작전이었대.”


 “Holy shit.”


 “씨바, 여기 온 지 몇 일이나 지났다고.”


 이젠 알아서 자기들끼리 웅성거리는 틈을 타서 나는 다시 계단을 밟고 올라가 한 구석의 내 독방으로 몸을 옮겼다. 테러 조직들의 상관 관계도가 깔끔하게 정리된 화이트보드가 걸린 벽은 분홍색 벽지로 싸여 있어 묘한 위화감을 주었다.


 전화기가 내 손에 쥐어졌다. 누구에게 먼저 전화를 할까? 빨갱이 녀석이 세상 달관한 표정으로 이미 늦었다고 넋두리를 하던 것이 영 맘에 걸렸다.


 전화기를 잡을 때만 해도 멀쩡하던 손이 번호를 누르면서 살짝 떨리기 시작했다. 전쟁이 두려워서 그런 것은 아니었다. 이런 빅 스케일의 전면전은 나로서도 첫 경험이지만, 그래도 사람이 죽어 나가는 것 따위는 지겹게 봤고, 일상이 작전이었다.


 내 손이 떨리기 시작하는 이유는 아무래도 전화를 걸려고 하는 상대방 때문인 것 같았다. 오해 때문에, 거리감 때문에, 떨어져서 살아오며 사랑이 풍화되면서 헤어진 뒤로 전화 해 본 적이 없다가, 어제 처음으로 전화를 걸어봤던 그 녀석, 빨간 머리의 순진한 그 녀석.


 사귀는 여자애도 있다는 데 내가 무슨 주책인지 모르겠다. 막상 그 녀석이 전화를 받으면 무엇을 말해야 할 지도 모르겠다. 입이 열려 봐야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나는 손을 멈출 수가 없었다. 가슴 한켠이 저려왔다.


 성의 없는 국제 전화 교환원의 늘어지는 응대가 사람 애간장을 더욱 타들어가게 만들었다. 이 씨발년이 왜 이렇게 말을 돌려서 하는 거야. 카드로 계산한다고 몇 번을 말해. 뚜우 - 뚜우 - 착신음이 이어진다. 숨이 멎는 것 같아. 지금 미국은 몇 시지? 일 할 시간인데 전화 받을 수 있을까?


 [ - 안녕하세요?……. ]


 “젠장, 안녕 나 제인이ㅇ…….”


 [ - …라이언 젠킨스의 전화기입니다. 지금은 아무도 없으니까, 급하신 일 있으면 메시지를 남겨 주세요. - 삐 - ]


 쿵쾅거리던 심장이 감자기 멈춰서 심장마비라도 걸리는 줄 알았다. 왜 이럴까. 그동안 잘 잊고 살았는데. 다른 여자 만나고 있다는 녀석한테.


 “안녕, 나야… 제인이. 제인 하코트.”


 일단은 가볍게 운을 떼었다. 입이 열려도 뭐라고 말해야 할 지 알 수가 없었다. 후우, 심호흡을 했다. 심호흡도 녹음 되었다.  그래, 일단 거짓말만 하지 말고, 진심을 이야기 해 보자. 무슨 이야기가 나오더라도, 나를 속이지 말고, 국가 안보와 기밀 유지에 위해가 되지 않는 선에서, 그거라면 될 거야.


 “만나는 사람도 있다는 데 자꾸 거북하게 전화해서 미안해. 난 그저… 전화를 한 이유가… 사실 좀 심란해서 전화 했어. 왠지 어쩌면… 이게 너와 할 수 있는 마지막 전화가 될 지도 모를 것 같아서 말이야… 그런 일은 있어선 안되겠지만, 사람 일이란 것은 모르니까 그래.”


 도입부는 잘 넘긴 것 같아 다행이었다. 사람을 밥 먹듯이 죽이는 직장에 다니면서도 이렇게 가슴이 떨려온 적은 없던 것 같았다. 차라리 저쪽에서 지금 듣고 있지 않다고 생각하니, 하고 싶은 말이 더 잘 생각나는 것 같았다. 어쩌면 차라리 다행이었다. 서로 수화기를  붙잡고 이상한 오해가 쌓여서 싸우는 것 보다는 이 편이 혹시 모를 마지막 인사가 되더라도 깔끔할 것 같았다.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후훗, 나 지금 엄청 떨리는 거 아니? 차라리 네가 지금 듣고 있지 않아서 다행이야. 그래서 말 하기가 더 쉬운 것 같아. 어제도 통화해 봤지만… 알잖아. 우리 사이 너무 어색해 진 거. 예전엔 수화기 한번 잡으면 열 시간도 자신 있었는데. 어쩌다 이렇게 된 걸까, 싶네.”


 다시 한번 심호흡. 이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머리 속이 또렷해진다. 어느새 나는 침대에 벌러덩 누웠다. 그 시절, 어느 새 부터 친구가 남자로 보이기 시작하던 그 시절 수화기를 잡던 열 여덟 살 소녀의 느낌으로, 하지만 입에서 나오는 말은 무거운 이야기였다.


 “오늘 전화한 이유가 있어. 여기는 어제 말 한 대로 독일이 맞아. 베를린이야. 사실 지금 굉장히 위험한 상태야. 뉴스 봤는지 모르겠지만… 뉴스에서 나오는 건 비교도 안 되게 심각해. 진짜야.”


 잠깐 말문이 막혔다. 무언가 속에서 올라오려는 것 같아서 막혔지만, 이내 감정을 가라 앉혔다. 그저 다른 사람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한다는 것이 이렇게 힘들고 기쁘고 아련하고 애틋하고 비장한 일인 줄은 몰랐다. 연애 하던 그 시절에도 몰랐다.  말문이 트였다. 다시 입을 열었다.


 “사실 너한테 처음 거짓말 한 뒤로 많은 일들이 있었어. 사람도 많이 죽여 봤고, 실전이라고 할 일도 엄청 많았어. 사실 지금도 그렇게 무섭지는 않아. 근데… 니가 보고 싶어. 진짜야. 그 때 거짓말 할 수밖에 없던 게, 우리가 헤어질 수 밖에 없던 게, 그동안 잊고 지낼 수 있다고 믿었는데, 아닌 것 같아. 정말 보고 싶다.”


 잠깐 베게에 얼굴을 묻었다. 눈가가 축축해졌다. 목이 메이는 것 같았지만 여기서 이야기를 끝낼 수는 없었다.


 “만나는 사람도 있는데 주책 떨어서 미안해. 다시 사귀자 뭐 이런 이야기는 절대 아니야.”


 거짓말.


 “그냥… 이번 파견이 끝나면, 꼭 미국으로 돌아 올 거야. 그럼 그때 다시 꼭 만나자. 십 년 전 처럼은 힘들어도, 십 오년 전처럼, 친구로 다시 한번 만나자. 아저씨 아주머니 뵌 지도 너무 오래됐어. 아버지는 가끔 독일 오셨을 때 만나 뵌 적은 있지만, 어머니 뵌 적도 너무 오래 됐어. 다 만날 거야. 아, 집에 가고 싶…….”


 [ < 딸깍 > - 제인? 젠장, 너 지금 어디야? 지금 무슨 일 있어? 왜 울고 그러는……. ]


 수화기 들리는 소리에 깜짝 놀랐다. 베이루트 뒷골목에서 처음으로 자살 폭탄 테러 진행 과정을 우연히 목격했을 때 만큼이나 놀랐다. 감정을 추스르고 다시 녹음해야 하나 살짝 고민하고 있었는데, 생각 없이 입에서 나오는 대로 말을 하다 보니 점점 이상해지고 있었는데,  이 괘씸한 녀석이. 그런데 기뻤다. 직접 통화를 할 수 있다는 게. 혼자만의 일방적인 주저리로 끝내지 않을 수 있다는 게 말이다.


“씨발 새꺄, 왜 전화를 안 받는건데? 니 내가 그렇게 싫냐? 메시지 지우고 다시 녹음하려고 했단 말이야. 씨발…….”


 [ - 미안. 미안해. 수화기를 들을 용기가 나질 않았어. 무슨 이야기를 해야 할지도 모르겠고……. ]


 “나는 뭐 생각 하고 전화 한 줄 아냐, 이 멍청아!”


 그런데 대답이 없었다. 전화기에서 아무런 소리도 나지 않았다. 내가 갑자기 너무 이상하게 굴어서 얘가 전화를 끊기라도 했나? 하지만 전화기에선 진짜 그 어떤 소리도 나지 않았다. 그 때, 불길한 예감이 들은 나는 오른손으로 눈을 훔치면서 컴퓨터 책상에 앉았다. 혹시나 하는 생각이 머리 속을 스쳤기 때문이다. 그리고 컴퓨터의 전원에 손을 대려는 순간, 창 밖에서 폭음이 들리기 시작했다.


 아니, 그것은 단순한 폭음이 아니었다. 강렬한 폭발음, 파괴, 그리고 붕괴의 소리가 이리저리 뒤섞인 느낌이었다. 익숙한 소리였다. 베이루트에서, 폭탄 테러로 건물이 붕괴될 때, 심심찮게 들었던 소리였다.


 연속적으로 울리는 그런 익숙해지기 싫었던 소리들을 뒤이은 것은 충격이었다. 물리적인 충격이었다. 그다지 가까운 곳에서 들리는 소리는 아니었지만, 아마 폭심지 주변으로 추측되는 곳에 주차되어 있을 수 많은 차량들의 도난경보기들이 시끄럽게 울고 있었다.


 네온사인이 번쩍거리는 현대화된 도시의 불야성 속에서, 차량 도난경보기들이 잉잉거리는 눈살 지푸리는 소리들이 아련하게 공명하며 사람을 자유롭게 만드는 도시의 공기를 불안하게 만들었다. 마치 앞으로 있을 사태를 경고하는 사이렌처럼.  베이루트에선 경보기가 달린 차량을 찾기가 쉽지 않아 조금 이질적인 경험이었다.

 

 그리고 그 소리의 진원지에 생각이 미친 나는 컴퓨터를 켜고 상태를 확인해 보았다. 나의 불길한 추측은 현실이 되어 있었다. 장벽 너머, 장막 너머 자유 진영에 주둔 중인 미군, 정보기관과의 컴퓨터 전산망 역시 완전히 먹통이었다.


 “시발, 방금 들었어? 너 저게 무슨 소리인지 알지? 지금 뭔가 터져서 집 무너진 소리 난 거 맞지?”

 

 앨런이 내 방문을 벌컥 열고서, 조금 전부터 도시 외부와의 통신이 전혀 이뤄지지 않고 있다는 이야기를 했다.


 다시 지하로 내려가 보니, 회사원들의 넋이 나가 있었다. 이 사람들에게 물어 보았자 아무것도 건질 것이 없어 보였다. 테이블을 주먹으로 내리쳤다. KGB 녀석의 기분 나쁜 눈동자가 내 시선을 정면으로 응시했다. 내가 물어보았다. 아마 소리를 질렀을거다.  


 “지금 무슨 장난을 벌인 거야?”


 “내가 말했잖아. 이미 늦었다고.”


 기분 나쁜 담배 연기가 다시 지하실 공기에 가득 찼다.


 “스페츠나즈가 움직이기 시작했어. 그 놈들이 시 외부와의 통신을 차단 한 거지. 희망은 당신들 뿐이었는데.”


 조금 목이 탔는지 녀석은 자기 앞의 생수병으로 살짝 목을 축이고 말을 이었다.


 “이제, 누군가는 벽을 넘어가야 해.”


 전쟁을 하기 위해서라도, 전쟁을 막기 위해서라도, 누군가는 벽을 넘어야 한다.


< 챕터 2 끝. >

오토 카리우스가 죽었다고 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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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전 고인을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굳이 좋아 싫어 나누라면 싫어하는 쪽에 가까울 것 같네요.


그저 이름 몇자만 들어봤을 시절엔 전설의 전차 에이스라길래 호감이 없었던건 아니지만


자서전 한번 읽어보니 그런 생각이 싹 가시데요.


정신상태나 정치적 가치관은 결국 흔한 독일군 장교였고, 자서전을 보면 전후 그에 대한 반성의 태도도 없어 보였구요.


그래서 그를 떠나보내는 많은 밀덕들처럼 명복을 빌어주고 싶은 생각은 없습니다.


그저 고인이 저승에서 자신이 죽인 사람들과 대화해보고,


자신이 지키려 했던 체제의 지도자들과도 이야기해보며,


고인 자신이 젊은 시절에 무엇을 위해 목숨걸고 싸웠는지,그리고 그것을 지킬만한 가치가 있는 체제였는지 곰곰히 돌이켜 보기를 바랄 뿐입니다.


고인이 다시 환생해 군인이 된다면, 나치나 기타 그 어떤 파시스트 돼지새끼들과는 상관없는, 진정으로 자신의 제복을 자랑스럽게 남들에게 보여줄 수 있는 군대에 복무하기를 바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