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선에서 병사의 운명이라는 것은, 때로는 불가항력적인 무언가가 작용해서 그것을 결정지어 놓기도 한다. 2차대전 당시 미 육군의 제 2레인저대대 병사라면 그 병사는 높은 확률로 기량이 풍부하고 잘 훈련된 병사이겠지만, 그가 있는 곳이 노르망디 해변가의 '프앙테 뒤 오크'로 향하는 최선두에 있는 상륙 제 1파의 상륙정 맨 앞자리라면, 이미 그 운명은 결정이 난 것이나 다름이 없다. 아무리 공습에 대한 대비를 철저히 준비한 사람이라도, 심지어는 공격을 할 당사자들조차도 다른 곳을 우선순위에 올려놓았더라도 그가 사는 곳이 나가사키이고 오늘 날짜가 1945년 8월 9일이라면, 왠지 모를 운명에 의해 핵폭탄에 맞게 되는 것이다. 나는 전쟁터에서 반 년 가까이 지내봤지만, 그래도 그 정도로 확실하게 죽거나 좆될 운명에 처해 본 적은 없었다.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비록 전투복 차림에다가 무좀에 걸렸는데도 불구하고 비록 전투화를 신었을 망정 그런대로 행복한 마음으로 잠자리에 들 수 있었다. 그보다 수 시간 먼저에는, 오랜만에 오랜 죽마고우와 나란히 앉아 이런저런 담소를 나누며 고기를 구워먹으며 몰래 술 한잔도 곁들였다. 그러나 이젠 아까전부터 떠들었던 그 운명의 순간이 내 목전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기독교 모태신앙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중학교때부터는 종교에 크게 연연하는 성격이 아니었고, 훈련소때는 천주교로 개종을 하고 절을 밥 먹듯이 다니곤 했었지만 이상하게 신에게 기대고 싶은 마음이 커졌다. 설령 적들이 섬기는 그 신이라도 말이다. 헬기 조종사가 내부 통신망을 통해 모두에게 말해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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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 좀 많이 꼬였네."
"그러게, 미안. 나 때문에 좀 난처해졌지?"
"이게 어디 '조금'정도로 퉁 칠 일이냐. 나중에 갚아. 원금은 내 한 달 월급 기준으로 210만원. 이자는 50프로. 휴가비는 계산에서 뺐으니까 고마운 줄 알고. 안되면 몸으로 갚아."
"이런 미친 새끼. 병사가 간부 성희롱했다고 군법회의에 넘겨버려?"
지금 현재 상황이 어떻게 된 거냐고? 사연을 설명하자면 조금길다면 길고, 간결하다면 간결하다, 나름 정리를 해서 설명을 해 보자면, 다음과 같다. 그러니 뭐가 어찌 된 건지 궁금하다면 다들 내가 하는 이야기 잘 들어 보도록.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난처한 상황에 처한 것은 나와 해인이 둘 뿐이다. 정말이다. 우리 소대엔 아직 전사자, 부장자도 한 명도 없다. 문제는 현재 이 지역에 남겨진 한국군은 우리 둘이 전부라는 것이다.
고지 정상에서 대략 600미터 정도 아래에 위치한 바로 그 조그마한 공터에 다다랐을 무렵이었다. 같이 따라왔던 아파치가 저 멀리서부터 TADS로 쫙 지상을 관측했지만 아무런 적의 징후도 포착되지 않았고, 예정대로 정상 아래의 좁은 공터에 인원들을 내려놓기로 결정되었다. 패스트로프가 임박하고, 양 옆쪽에서 로프가 지면을 향해 쭉 늘어질 그 시점에, 갑자기 헬기 조종사와 부조종사가 무슨 무전이라도 들었는지 불안하게 웅성대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더니 갑자기 우리 분대 무전망으로 날아든 소대장의 목소리.
[ - 부소대장! 패스트로프 관두고 조금만 더 대기해봐요! LZ 새로 찾아봐야 할 거 같아!]
급한 나머지 통신용어조차도 지키지 않고 평문으로 귀에 꽃힌 목소리는 분대원 모두를 당황하게 만들기 충분했다. 해인이도 당황스러웠나보다. 멍청한 느낌으로 "예?" 하더니만, 무어라 더 물어보려고 해인이는 다시 버튼을 누르고 입을 열었다. 바로 그 순간, 재앙이 시작되었다. 분명히 아무것도 보이지 않던 그 곳에서 기관포탄이 씽씽 날아들기 시작했다. 못해도 대쉬K 이상은 되어 보이는 강력한 대공포화였다. 패스트로프를 준비하던 기체가 요동치고, 기체 안은 순식간에 엉망이 되어버렸다. 특히 세 블랙호크들 중에서도 가장 선두에 서서 먼저 하강을 준비하고 있던 우리 헬기는 그 정도가 심했다.
"꺄아악!"
제일 먼저 내려가기 위해 자세를 잡으려던 해인이가 그대로 기체 밖으로 몸이 넘어가 버린 것이다. 1초도 안 되는 찰나의 순간이었다. 하지만 30분도 더 되는 것 같았다. 이래서 전역날이 안 오는거지. 순간적인 영원. 내가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판단이 섰고, 난 그대로 행동했을 뿐이었다.
"해인아!"
내가 해인이를 잡으러 몸을 날리듯, 누군가 나를 잡아 주겠지. 그렇게 넓은 기체도 아니잖아. 난 주저 없이 헬기 바깥으로 몸을 날렸다. 바깥으로 몸을 날리면서, 언뜻 몇 발인가의 예광탄이 기체에 명중하는 것이 느껴졌다. 난 분명히 기체에서 몸이 떠나 있었지만, 기체는 더욱 심하게 요동혔다. 그것이, 그 기체의 요동이 느껴졌다. 내가 해인이의 오른손 손목을 꽉 붙잡은 것도, 해인이 역시 반사적으로 내 손목을 꽉 쥔것도 같이 느껴졌다. 휴, 다행이다.
"내 손 놓지 말고 꽉 잡아!"
내 발목에서도 무언가 잡아채는 느낌이 나는 것이, 누군가 내 두 발목을 꽉 잡았던 것 같다. 하지만 헬기가 오르락 내리락 요동치는 가운데서, 헬기가 지면에서 수 미터 위까지 내려앉는 그때, 기체에 다시한번 충격이 전해지나 싶더니, 무슨 이유에선지 내 두 발목을 잡은 손에서 힘이 풀려지는 것이 느껴졌다.
"안 돼!"
저편에서 누군가 외치는 소리가 언뜻 들려왔다. 헬기가 이리저리 요동치는 판이라, 나와 해인이가 땅에 떨어질 때는 땅이랑 좀 가까워서 망정이지, 하마터면 말이 씨가 된다고 진짜로 운지할 뻔 했다. 하지만 그래도 떨어진 점은 변함 없었다. 평평하긴 했지만, 결코 부드럽지만은 않았던 그런 바닥에, 나와 해인이가 그렇게 내동댕이쳐졌다. 일본만화나 라이트 노벨인지 뭐시기 한 그런 물건들에서처럼 자빠지면서 절묘하게 껴안든 자세가 된다던지, 가슴에 얼굴을 비비적댄다던지, 아니면 모 전쟁문학에서처럼 누가 누구의 등짝을 보는 자세로 엎어졌던 것 같은 일은 없었다. 그냥 공터 사방에 나뒹굴었다. 설령 그런 모양새가 되었더라도 가슴에 얼굴을 비비적댈 일은 없었을 것이다. 해인이는 내가 SPC와 ESAPI를 질렀을 때 그것을 같이 공동 구매했던 그런 녀석이었으니까. 가슴은 두터운 ESAPI 방탄판을 뚫고서야 만날 수 있는 것이다. 처음 그것을 샀을 때, 밀덕 친구 서당개 10년이라 이것저것 주워듣긴 했지만 밀덕후는 정대 아니었던 해인이는 SPC와 IOTV를 두고 이런저런 고민을 했었다.
"이거 봐. 이건 목덜미랑 어깨도 보호해주네."
"저런 건 차로 돌아다니기 쉬운 이라크에선 몰라도 아프간처럼 산 타고 다니는 곳에선 무거워서 입고 다니기 힘들대. 그 덩치 좋은 미군 애들이 IOTV니 MTV니 하는 것들 아프간에서 못 입겠다고 쓰는게 SPC같은 플레이트 캐리어란 말씀이야."
"하긴, 그냥 보급 나온 방탄복도 무거워 죽겠는데 말이지."
아아, 그 시절이 좋았지. 비싼 방탄복을 질러놓고도 정작 써먹어 본 적이 없었는데, 이렇게 그 기회가 다가오는구나. 반갑지만은 않은데.
큰 대자로 뻗어서 잠시 정신줄을 놓고 있던 나는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 보고 있었다. 오렌지색 빛줄기가 씽씽 지나다니고 있었지만, 이제보니 블랙호크 쪽으로 날아드는 것은 얼마 없었다. 대부분 아파치로 집중되고 있었다. 하긴, 아파치가 정신차릴 시간을 줬다간 바로 역관광 당할테니까. 그 때, 해인이가 내 시야에 들어오더니만, 손바닥으로 내 뺨따귀를 가볍게 갈겼다. 난 인상을 찌푸리면서 무어라고 욕지거릴 내밷었다. 해인이는 안심하며 내게 손을 내밀었고, 난 그것을 잡고 몸을 일으켜 세웠다. 그 순간, 하늘에서 커다란 폭발음이 들렸다. 나는 다시 하늘을 올려다봤다. 아파치 꼬리가 뚝 떨어져서, 빙글빙글, 마치 회전목마처럼 360도 스핀을 돌며 어디론가 떨어지고 있었다. 동체에 붙은 불 때문인지, 아니면 원체 아프간 밤 하늘의 별이 밝은 탓인지 밤인데도 검은 연기가 풀풀풀 나는것이 보였다. 그나마, 대부분의 공격을 본의아니게 살신성인의 자세로 받아냈던 아파치의 희생 덕분인지, 블랙호크들은 그 틈을 타서 정신을 추스리고 오던 방향으로 다시 돌아가기 시작… 응? 돌아가?
"야, 이 개새끼들아! 우린 어떡하라고!"
고래고래 험담을 입에 담으며 헬기를 향해 주먹을 흔들어대는 나의 격렬한 몸짓과는 별개로 나의 머릿 속에서는, 언뜻 고등학교때 봤던 전쟁영화의 한 대목이 생각났다. 블랙호크다운이니 하는 그런 물건은 아니고, 아버지의 깃발. 클린트 이스트우드 할배의 그거. 수송선 갑판에서 깝치던 해병 하나가 실수로 바다에 떨어졌지만 아무도 안 구해주고 그 병사를 버려두고 가는 그 모습. 해인이가 나를 붙잡고 근처 바위에 몸을 숨겼다.
그렇게 무심하게 헬기들이 멀어지고, 잠시나마 정적이 찾아왔다. 그리 오래가지는 않을 것이 뻔한 정적이었다. 생각할수록 납득이 안 되고 기가 막히고, 시빙고나 남산 지하실에서 설렁탕 붓는 급으로 코가 막힐 노릇이었지만 무슨 바라쿠다 위장망이라도 쳐 뒀는지, 아파치의 고성능 야간감시장비를 속이고 대공포화를 날려댔던 저 놈들이라면 지금 헬기에서 두 명이 떨어져있다는 사실을 모를 리가 없었다. 확증이나 근거는 없었지만 왠지 그 편이 상식적으로 느껴졌다. 내가 그렇게 소리를 질렀는데 모를리가 없지. 해인이에게 미안해졌다.
바위에 몸을 숨긴 우리가 제일 먼저 한 것은 서로의 건강상태와 간단한 간이 군장검사였다. 나는 멀쩡하고, 해인이도 심하게 다친 곳을 없이, 그저 아까 떨어지면서 허벅지에 멍이 조금 들은게 전부였다. 음, 지독하게 재수 좋구만. 다음은 장비 체크. 해인이는 모두 멀쩡했다. 나는, 아 시발. 아까 떨어지면서 K2소총의 장전손잡이가 부러져버렸다. 예비 장전 손잡이를 주머니 안에 넣어 뒀었는데, 이상하게도 필요 없을땐 항상 손에 잡히던 녀석이 막상 필요할 때가 되면 만져지질 않는다. 갑자기 2188고지 전투 때가 생각났다. 그 때, 나는 어느 소가리의 시신을 목격했었다. 내가 살리기 위한 노력을 할 여유조차도 안 주고, 바로 뻗어버린 불친절한 시체였다. 쏘가리의 오른쪽 허벅지에는 레그 홀스터에 곱게 물린 K5 자동권총이 있었다. 해외 파병부대에다가, 다른 녀석들과는 노는 물이 다른 게 우리 여단인지라, 쏘가리들이 권총을 가지고 다니는 것은 흔한 일이었지만, 이것은 조금 다른 경우였다. '가질까? 말까?' 권총을 가지고 싶었다. 적어도, 주인이 분명히 잇는 권총을 훔쳐다 차고 다닌 씬 레드 라인의 모 일병보다는 떳떳한 짓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왠지 꺼림찍했다. 주위 시선도 의식되었다. 결국 나는 그렇게 권총을 포기했었다. 실수였다. 그 때 권총을 챙겼더라면, 지금 최소한 맨 손은 아닐텐데!
[ - 당소 Lima Niner. 혹시 아까 Black Haxk에서 추락한 인원 듣고 있으면 응답 바람, 이상.]
그런 무전이 날아 온 것도 바로 그 와중이었다. 엄밀히 말하자면, 그 직후였다. 좀 심각하게 꼬바랑대는 영어 발음이었지만, 우리가 떨어졌다는 사실을 잊지 않고 연락 해 오다니, 이 기특한 것들. 나와 해인이는 서로를 마주보았다. <리마 9>이란 콜사인은 처음 듣는 것이긴 했지만, 아군임은 틀림없었다. 서로의 얼굴엔 입이 귀에 걸려 잇었다. 일단 계급 상 선임자인 해인기가 목소리를 가다듬고 답신했다.
"음, 음, 리마 아홉, 여기 엔젤 하나 하나. 불안하던 차에 반갑다. 귀소특은 9특전단인지? 아니면 9사단 수색? 설마 3기갑?"
그런데 무전기 너머에서 날아오는 이야기는 청천벽력과도 같았다.
[ - 증원병력을 기대했던 것 같구, Angel One-One. 아쉽게도 귀소든 Hill Owl 정상에서 아등바등 버티고 있는 SOF들이다. 실망시켜서 미안하다. 이상.]
그러니까, 지금 꼬부랑 영어발음이 좀 많이 섞인 이 유창한 한국어 무전이 실은 지금 산꼭대기에서 누군지로 모를 HVT를 붙잡고 히키코모리 스타일로 농성중인 그 국적조차도 모르는 외국군 특수부대에서 날아왔다는 이야기였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군대 오기 전에 편의점에서 악덕 점장에게 시급 3,500원으로 착취당하면 야간 알바 하다가 마주쳣던 살찐 고든 프리맨처럼 생겨먹은 외국인 아저씨보다는 한국말을 훨씬 자연스럽게 하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이거 여자 목소리다. 외국에서도 여군을 특수부대에서 받아주나? 그보다 우리 쪽 주파수는 어떻게 알았지? 이것저것 궁금증이 용솟음쳤지만, 무전ㄱ를 붙잡고 잇던 해인이가 제일 궁금한 것은 다른 것이었다.
"그럼 현재 귀소측이 알고 있는 적성세력의 현황은 어떤지 말해줄 수 있는가, 이상?"
[ - Affirmative, Angel One-One. 당소도 처음연 알 카에다 Muja-Fucking-hedeen 정도로만 알고 있었는데, 계속 교전해보니 저쪽에서 가끔 러시아말도 들리고, 전술 장구류들을 제대로 착용한 적성세력들이 종종 눈에 띄는것이 단순한 현지 게릴라들이 나 알 카에다 테러리스트들은 아닌 것 같다. 체첸 녀석들이 아닌지 의심해 보는 중임. 무장상태는 큰 특이사항 없으나 당소 측으로 심심찮게 박격포탄이 날아오고 있다. 파괴력을 보아하니 중박격포는 아니고 중대단위에서 쓰는 60밀리급 경박격포로 추측됨. 아마 당소가 잡고 있는 HVT 때문에 섣불리 화력을 총동원하지 못하는 것으로 짐작된다. 그렇지 않고서야 아측 Chopper들 잡을 때 썼던 인접 고지의 Triple A들을 이쪽에대 대고 쏘지 않을 이유가 없다. 그 외에 위치 미상, 종류 미상의 MANPAD가 끈질기게 CAS를 방해하는데, 발사 흔적을 볼 때 고지 정상에서 대략 400미터 아래에 위치한 부락에서 사격중인 것 같다. 참고로 박격포도 그쯤에 있지 않나 추측중임. 근데 당소 위치에선 커다란 바위에 가려서 해당 지점이 제대로 관측되질 않아 제압이 불가능하다. 이상.]
"정보 고맙다, 리마 나이너. 근데 그 빌어먹을 HVT는 도대체 뭐하는 놈이라서 이놈들이 그렇게 집요하게 달려드는지, 이상?"
이건 내가 멋대로 끼어 든 무전이었다. 불친절하고 무례한 무전이었지만, 조쪽에서는 그런 무전에도 친절하게 응대해주었다. 내가 물어보는 것에 대한 답까지 알려주면서 말이다.
[ - 어차피 비슷한 처지에 놓인 마당이고 저쪽도 누가 없어졌는지 잘 알고 있으니 귀소측에게도 알려주겠다. 당소가 확보한 High Valuer Target은 아이만 알-자와히리. 빈 라덴이 요단강 건너간 현재 알-카에다의 최고 지도자이다. 이 HVT는 무슨 일이 있더라도, 최소한 시체라도 아측이 확보해야 한다. 10년째 끌어온 지긋지긋한 Operation Enduring Freedom을 마무리 지을 절호의 기회이다. 이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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